여자아이는 분홍, 남자아이는 파랑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선호도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는데 이는 과거부터 거슬러온 현상일까 아니면 어떤 요인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현상일까? 성별을 규정하는 색상에 대해 미국 메릴랜드 교수 파올레티는 내셔널지오그래픽 2017년 1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세기 초가 돼서야 옷 색깔에 따른 성별 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40년 무렵에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성별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인식이 확립돼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자아이는 분홍색, 남자아이는 파란색 현상이 고착화 되는데 미국이 크게 기여했으며, 바비 인형과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 그 외 미국 아동 상품에 흔히 사용된 색상들이 이를 부채질했다”. 또한 이 잡지는 역사상 최초로 트랜스 젠더를 표지 모델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 모델은 에이버리 잭슨으로 9살이다. “여자가 된 후 가장 좋았던 건, 더는 남자인 척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2016년에 개봉했던 영화 <대니쉬 걸> 역시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했던 덴마크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레미제라블><킹스 스피치>의 톰 후퍼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대니쉬 걸>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여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해 볼 수 있는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명작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어쩌면 너무 밀착되어서 가면인지 실제 얼굴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 가족에게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센 척하는 남자들이나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착한 척하는 여자들 모두 가면의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성은 그냥 의사, 배우가 아니고 여의사, 여배우다. 보통명사 앞에 여성을 붙여 형용사 취급을 한다. 형용사 취급을 한다는 것은 잉여로 여긴다는 의미다. 원래는 그 명사에 내포되지 않아도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Sex)’과 사회적으로 주어진 ‘성별(Gender)’을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과 ‘성별’을 혼동하고 있다. 여성이 임신할 수 있는 건 ‘성(Sex)’ 때문이지만, 여성이 아이 기르는 일을 도맡는 것은 ‘성별(Gender)’에 의한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성 중에 가족으로부터 “너는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러냐?”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기서 ‘멀쩡하게 생겨서’는 ‘외모가 투박하지 않고 여성스럽게 생겨서’라는 말일 것이고 ‘왜 그러냐’는 ‘왜 여자답지 못하냐’의 의미일 것이다. 후자의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흔히 ‘여자답다’는 것은 집안일과 내조를 잘하며 조신한 것을 뜻한다. 이러한 관념들은 여성 자신의 관심이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닌 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즉 본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환경적인 문제다. 나 역시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와 주변 사람에게서 수태 들어왔던 말이다.
여성들은 왜 쌈닭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일반적으로 모성성은 숭고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모성은 타고난 본성이 아닌 가부장제로부터 생겨난 이데올로기다. 모성을 타고난 것으로 여긴다면,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들은 죄책감이 들게 마련이다. 또한 여성주의나 페미니즘을 떠올리면 쌈닭 또는 트집 잡는 여자들로 인식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쌈닭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거기에는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닥 편안하지 않다는 분노가 깔려있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며, 그 억압받는 사람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도 될 수 있다. 남성이 남성으로서 겪는 고통 역시 여성이 아닌 젠더라는 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리는 기본권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가져야 할 권리로 무언가를 해야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지는 않는다. 착취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좀 더 저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 세상에는 그 존재만으로 획득되는 권력이 있다. 유색인종과 함께 할 때 백인이 가지는 권력, 여성과 함께 할 때 남성이 가지는 권력, 청소년과 함께 할 때 성인이 가지는 권력, 다양한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가지는 퀴어와 함께 할 때 이성애자가 가지는 권력 등이다.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분석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에 의하면, 원래 한 인간 안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함께 공존한다. 남성 안의 여성성을 아니마라 하며 아니마에 의해 남성들은 여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여성 안의 남성성을 아니무스라 하는데 이것에 의해 여성은 남성을 이해한다. 우리는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너무 억압하지 말고 이제라도 여성은 여성 안의 남성성을, 남성은 남성 안의 여성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검은색과 흰색을 섞어 회색인간을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라 생물학적 특성과 차이는 지키면서 양성의 미덕을 갖추자는 것이다. 즉 ‘따로(섹스)’와 ‘같이(젠더)’의 문제를 잘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다원화된 사회로 문화‧인종뿐만 아니라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살려주는 시대다. 여자든 남자든 동일하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 될 때 가능해진다. 더 나아가 『젠더 무법자』의 케이트 본스타인은 남자 아니면 여자로만 구축된 이분법적 체제를 의심한다. “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인가? 매달 하혈을 해서 여자인가? 많은 여자가 임신 가능성이 없는 몸으로 태어나고, 갱년기 이후에는 모든 여자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 이 여자들이 여자이기를 그만둔 것일까? 건강상의 이유로 자궁 절제술을 받았다면 이 수술은 성전환인가? 당신은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어서 남자인가? 만일 당신의 정자 수가 적어서 임신이 어렵다면 어떨까? 당신이 방사능 피폭으로 임신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당신은 여자가 되는 것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당연한 것이 곧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끼도록 조건화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차이를 견딜 수 있는 힘, 차이를 환대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야말로 나와 타인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안도현의 『연어』의 한 구절을 공유해보자.
“물속에 사는 연어는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물고기를 옆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연어를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 그것은 연어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연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눈은 틀림없이 물수리나 불곰의 눈을 닮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연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연어 알을 떠올리며 입맛을 쩝쩝 다실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연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연어를 옆에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눈.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상상력은 우리를 이 세상 끝까지 가보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상담가인 나로서는 더욱 더 가슴에 새겨지는 글이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행동일지라도 연어를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면, 연어 입장에서는 물수리나 불곰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다. 따라서 연어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연어를 옆에서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가져야 하는 마음의 이치와도 같다. 며칠 전, 집 앞 산책을 하다가 커피와 간단한 음료수를 파는 푸드트럭에 묶여있던 개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리저리 몸을 일으켜 움직여 보지만 짧은 목줄로 인해 그 주변을 맴돌다 결국은 계속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산책할 때마다 만나게 되는 그 개는 늘 자고 있다. 인간으로서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