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지나가는 방식
“저는 화가 잘 안 나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 같으면 충분히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깁니다.
이런 경우, 정말 화가 없는 걸까요?
혹시 화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내담자가 떠오릅니다. 심리검사(MMPI-2, TCI) 결과에서도 크게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성숙하고 안정적이었고 불안이나 긴장 수준도 비교적 낮았습니다. 주변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감정 기복도 크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관계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 다른 흐름이 보입니다.
“연애만 하면 반복되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 늘 제가 더 맞추게 돼요.”
(상담자) “그때 정말 아무 느낌도 없으셨어요?”
(내담자) “… 아예 없는 건 아닌데요”
상담에서는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기 전에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불편한 순간이 있어도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조금 서운한 마음이 올라와도 “내가 이해해야지”라고 정리해 버립니다.
그러다 화가 날 수 있는 순간에도 “굳이 말 안 해도 되지” 하며 넘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올라오기 전에 멈추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많은 경우, 이유는 단순합니다.
갈등을 피하는 것이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말하지 않는 것이 편했고
참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었고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화’가 아니라 ‘경계’입니다
“여기까지는 괜찮고, 여기부터는 어렵다”는 기준
그런데 이 기준을 계속 넘기면 관계는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나는 계속 이해하고 상대는 점점 편해지고 관계는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담에서는 경계 설정을 하기 위해 화를 크게 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금 불편하다”를 말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그 말은 조금 불편했어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혹시 “나는 왜 화가 잘 안 날까”라는 생각을 하신다면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셔도 좋습니다.
“나는 언제 내 감정을 그냥 넘기고 있을까”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