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미정 Aug 15. 2023

바삭바삭

살림의 꾸밈말 2

제법 오랜 시간 한 곳에서 버텨온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다. 자연스럽게 에너지 절약을 하고 있구나 싶어 어깨가 으쓱하다가 등줄기와 젖가슴 사이로 땀줄기가 흘러내려 에너지 절약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던 더운 날. 입천장이 바짝 말라가던 차에 김을 발견했다. 이 김은 보통 김과는 달랐다. 지인이 한국에서 공수받은 김을 우리 가족에게 선물을 한 것인데 빳빳하고 결결이 살아있는 자태가 참 도도했다. 집 안에 앉아 땀을 쏙 빼고 있자니 잘 챙겨 먹어야만 할 것 같아 얼떨결에 김을 굽기로 했다.


우선 인덕션 위에 제법 넓은 스텐레스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예열을 시작했다. 그다음 갈색 병에 담긴 참기름을 야무지게 입을 오므린 접시에 졸졸 따라 놓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고소하다 못해 구수한 향기가 코끝에 울려 퍼졌다. 나는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 꼭 깨 볶는 소리가 환청처럼 함께 들리곤 하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냄새를 맡자마자 톡톡 오감이 날뛰었다. 다음 차례는 소금. 맛보기 전까지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소금을 접시에 따라 놓고 이번에는 숨을 살짝 들이마셨다. 역시나 아무 느낌도 없다. (콧구멍으로 소금이 안 들어간 게 다행일지도.)


재료 준비만을 마쳤을 뿐인데 이마에도 코끝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앞치마도 거추장스러울만치 뜨거운 더위 앞에서 김 한 장을 꺼내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았다. 그 위에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툭툭. 약불이었는데도 제법 뜨거웠는지 김이 소리를 낸다.


바삭바삭


거무 튀튀 했던 김들이 참기름 치장에 소금 마무리로 자갯빛 영롱함을 머금은 채 초록색으로 피어나니 내 얼굴도 덩달아 펴졌다. 김 좋아하는 아들 손에 바삭바삭 버무려져 입에 쏙 들어가는 모습, 식성 좋은 남편 젓가락에 쌍으로 뽑혀 쭉-편 자세를 유지한 채 입속으로 투하되는 모습, 떨어진 김조각이 아까운 내 두 손에 바스러진 김조각이 모여 흰쌀밥에 뿌려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때 어김없이 알람이 울렸다. 나는 지금 아들을 데리러 가야 한다.


아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코를 킁킁댄다. 냄새가 너무 좋다며 야단이다. 그리곤 얼렁뚱땅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김하나를 집어 든 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내 마음도 덩달아 바스락바스락. 맛있는 한 끼를 먹고 부풀어 오른 배가 가라앉기까지 심심한 시간을 보내던 아들이 느닷없이 연필로 따라 그리기를 하자고 한다. 둘이 마주 않아 연필을 한 자루씩 쥐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데 아들이 그런다.


바삭바삭. 연필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나!  


김에서 묻어온 소리인가? 연필이 바삭바삭 소리를 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는 한껏 웃어 젖히고 연필을 다시 쥐어 잡았다. 오늘을 기억하는 바삭바삭 메모를 적어놓기 위해서.


바삭바삭 기분좋은 연필소리


매거진의 이전글 쓱싹쓱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