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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미정 Aug 29. 2023

속닥속닥

살림의 꾸밈말 4

임신 16주 차에 태아의 성별을 알았다. 초음파 사진을 화면에 띄워 놓고 요리조리 살펴보던 의사가 태아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아주 조그만 형체가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작은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나 같은 딸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해외이주여성의 삶에 뛰어든 순간부터 지독한 임포스터 증후군에 시달렸고,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는 우울증 초기 증상들도 함께 경험했다. 출산 후 찾아온 산후 우울증은 우연이 아니었다. 


속닥속닥


집 밖을 나설 때, 버스에 올라탈 때, 장을 보고 계산을 할 때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모두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사람이 지나간다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저기 있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결국 나는 폭주하는 내 심장을 다루지 못해 큰 사고를 쳤고, 그제야 남편의 권유로 병원 정밀 진단을 받았다. 진단 결과는 호르몬 교란으로 인한 갑상선 항진증이었다. 그 후로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속삭이는 말들이 싫다. 그동안 말하지 않은 말들까지 감지하는 몹쓸 안테나까지 탑재하였기 때문일까?


이런 나에겐 속삭이는 것을 돌같이 하는 남편이 있다. 남편의 목소리는 꽤나 우렁차다. 성악을 전공했냐는 질문을 여러번 받을 정도로 목소리에 뱃심이 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속삭이는 말이 필요한 경우엔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데 내 뱃속에서 나온 아들도 딱 그런 면을 닮았다. 


몇 달 전 엄마의 날에 두 남자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방 문 너머로 들렸다. (과연 이게 속삭이는 것인가.) 무슨 일인가 나가보니 그 둘은 더욱더 속삭였다. 


("아들, 준비되었지?")

("응. 아빠, 비밀이야. 절대 엄마한테 먼저 말하면 안 돼.")

("그럼. 아들이 꽃이랑 카드랑 전해주는 거야. 알겠지?")

("아빠. 엄마 나왔다. 진짜 이야기하면 안 돼.")


아니 이건 뭐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 아닌가? 나를 보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두 남자를 보니 '어쩌면 이렇게 속삭이는 게 안 되는 두 남자가 다 있나' 싶었다. 짐짓 모른 채하며 다가가니 아들이 화들짝 놀란다. 납작하고 길쭉해지는 눈매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가 뭔가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눈치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잠깐 마주하다가 결국 못 참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Happy mother's day!"

"여보 그동안 진짜 수고 많았어."


또렷하고 선명한 목소리다. 그들 다운 언어로, 그들 다운 울림으로!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속삭임이 이어졌다.


(속닥속닥) 엄마 맛있는 밥 해줘서 고마워요


한껏 목구멍으로 말려들어간 아들의 목소리는 나만이 아닌 남편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꽤 컸지만 나의 귀 가까이에서 숨결과 함께 전달된 그 온기가 나를 다독였다. 그래, 그 귀여운 입속에 내가 지은 밥이 후루룩 빨려 들어간단 말이지! 동시에 정성스러운 한 끼 식사를 위해 물 앞에 서고, 불 앞에 서고, 더 나아가 뿌연 안개를 헤쳐나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밥을 지으며 매일 이렇게 똑같이 반복하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맛있어져라' '이거 먹고 모두 건강해져라' 속삭였던 내 마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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