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몇 시간 거리라도 데려다줄 수 있지
집이 분당인데 홍대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간다고? 미친 거 아니냐.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아쉬운 연인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자 한쪽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을 함께한다. 어두운 밤 여자 친구의 귀가를 걱정하는 남성 쪽이 이런 수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저렇게 먼 거리를 불사하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놀랍긴 하다. 데이트를 홍대 근처에서 했다면 이해가 가지만.. 만약 강남이었다면? 심지어는 동네에서 만났다가 코앞에 있는 집을 놔두고 데려다주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왕복 2시간 여정의 피로감이 내일의 출근에 미칠 여파는 사랑의 힘으로 다 해결된다는.. 그래 뭐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이런 여정이 굉장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개인적으로는 집에 가는 동안 온전히 혼자인 게 좋아서 연인에게도 절대 집에 데려다주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집이 완전히 반대방향인 너를 차에 태워! 집 앞까지 데려다 주다니?
몇 년 전 뉴질랜드에서의 일이다. 카페에 출근한 첫날 A를 만났다. 여기저기 첫인사를 하고 이제 팔을 걷어붙여 일을 하려는데 옆으로 누군가 쓱 다가왔다. 밝게 웃는 얼굴에 호기심 가득한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내 이름과 나이를 묻더니 곧 친근하게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같이 일하게 될 새로운 직원에게 보이는 꾸며낸 친절함이 아닌 것 같았다. 덕분에 기분 좋게 일을 시작했다. 어디서나 나의 첫 하루는 이래저래 요령을 터득하는 날이었는데 A는 옆에 주기적으로 와서 노하우를 알려주고 불편한 건 없느냐고 내 상태를 체크해줬다. 간간히 뒤에서 나를 보며 내가 잘하고 있는지 보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매니저쯤 되는 건가..? 싶었다.
메인 셰프가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의 일터였다. 다들 입 닫고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에만 충실하게 일했는데, A만 입 밖으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첫날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귀를 쫑긋.. 할 필요가 없었다. 정보가 뚫린 귀로 줄줄 들어왔다. 듣자 하니 누구 둘은 만나고 있고, 저녁에는 근무가 어떻게 돌아가며, 어제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고 저녁에는 남자 친구랑 뭘 먹을 건지..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실 별로 없어서 모르는 척 내 귀를 막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사실 비밀이었다면 새로운 직원 옆에서 떠들지도 않았겠지 하고 그저 들었다. 나는 소음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고 남 얘기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A는 말소리의 크기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말을 재미있고 조리 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술처럼 들이키며 온 동네 이야기를 하는 목욕탕 아주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굳이 가까이 하진 않을 것 같지만 얘기는 재밌네, 싶은.
A는 말하기도 좋아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오지랖이 아니라 좋은 의미로. 어느 날 근처 직업학교에서 인턴을 하나 보내왔다. 한국인들끼리 한국어로 편하게 일하다가 이 인턴 B 때문에 영어를 쓰자니 다들 갑자기 어색해졌다. 그러다 보니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한국어로 전달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다 보니 B가 조금 소외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실습시간만 채우러 왔는지 정말 음식에 대해서 배우러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 자체도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는 재료 손질에 집중되어 있으니 뭘 하나 싶었을 것이다. 항상 바로 옆에서 일하던 나는 B의 고충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지만, 당시 내 손발이 꽝꽝 묶여 있었다. 나는 셰프가 아니라 뭘 가르쳐 줄 수도 없었고 마침 그때가 현재까지도 이어진 이 우울증이 시작될 때쯤이어서 마음이 100%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웃음을 쥐어짜 인사를 건네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축 처져가는 B가 A의 출근날에는 항상 얼굴이 밝았다. 당연한 일이지! 말할 상대가 생겼으니까! A는 단순 프렙 지도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재료 설명도 더해가며 B의 인턴 생활을 채워줬고, 중간중간 스몰토크로 유려한 진행을 이끌어갔다. 덕분에 나는 같이 일할 때도 몰랐던 B의 학교 생활, 연애 생활도 뚫린 귀를 통해 듣게 됐다.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쳤다. 입과 손, 몸이 먼저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실수로 인한 지적도 이어졌다. 말이 없는 메인 셰프는 A가 떠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홀에 손님들이 있으니 말소리를 낮추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정작 잠자코 옆에 있던 나는 수업시간에 떠들다 걸린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A는 밝게 '네~' 대답하고는 한동안 조용하다가 다시 아주 작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고 적당한 소음과 대화는 허용되니까 문제는 되지 않지만, 사실 어디서나 하지 말라는 걸 계속하면 미운 사람이 있는데 A는 그것도 괜찮았다. 왜였을까? 적당히 선을 지킬 줄 알아서? 이런 지적에도 웃고 넘길 줄 알아서?
어느 날은 급한 상황에 A의 몸이 먼저 반응하자 나서지 말라고 지적을 받은 적도 있었다. 평소 좋게 좋게 이야기하는 메인 셰프가 상황이 급박해지자 조금 날카롭게 반응했는데도 A는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반응이 너무 신기했다. 성향이 너무 달라서 놀라웠다. 나는 언제나 지적받지 않기 위한 삶을 살아와서, 아주 사소한 비판이나 지적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잘못했구나, 나를 자책하고 계속 담아두고 곱씹고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그런데 A는 지적을 받은 이후에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하고 다음 상황으로 빨리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사실은 이것이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만, 지적을 받고도 부정하며 버팅기거나 나처럼 속에 담아두는 사람만을 봐 왔던 내 시야가 너무 좁았다. 사실 모른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나처럼 자책했는지도. 하지만 겉으로 보는 A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배우며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뭘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었고, 어제 뭘 봤는데 어떻게 좋았고, 이것도 너무 재밌고 저것도 정말 좋고.. 그런 사람에게는 지적도 하나의 즐거운 자극이었을까.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분당 남자 친구 빙의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한 예약 테이블의 파티가 길어져 모두 영업시간이 지난 후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대부분 직원들은 근처에 살았고 나는 당시 캠퍼밴을 끌고 다니며 여행하듯 살았으니 늦어도 운전해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A는 꽤 멀리 살아서 버스가 끊기기 전에 보내줘야 했는데, 우리도 손이 모자란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일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A를 내가 바래다주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차가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고 사실은 나도 캠핑장에 돌아가려면 다시 일터를 지나고도 데려다준 만큼을 또 가야 했다. 피곤할 게 분명했고 선뜻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마음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타지 않은 보조석을 치워 A를 앉히고 구글맵을 찍어 밤거리로 나갔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A가 진행하는 밤의 토크쇼에 온 것 같았다. 그렇지만 또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야경을 보고 바람을 맞으며 대화 끝을 생각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마이크를 쥐면 놓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A는 적당히 대화에 긴장도 부여할 줄 알았다. 밤이 깊으니 말소리도 생각도 다 조근조근하게 변했다. 이제껏 살아온 삶의 궤적을 조금은 알게 되는 대화를 했고, 목욕탕 아주머니처럼 남 얘기만 하거나 마냥 생각 없이 얘기하기 좋아서 떠드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나 앞으로의 진로 등 진지한 고민도 많이 하고 있구나.. 나는 극 외향적인(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피곤해하는데 A와의 대화를 통해 피로가 쌓이기는커녕 뭔가가 내 안에서 충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말 많은 사람들은 '너는 닥쳐, 내 얘기를 할 거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A는 말을 들어주는 능력도 탁월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이었다. 아쉬운 토크쇼를 마치고 집 앞에 내려준 후 캠핑장으로 돌아가자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 되었지만 전혀 시간 낭비 같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자기 전까지도 우리의 대화를 다시 곱씹고 생각으로 굴렸다.
처음엔 그저 내가 모두에게 그러듯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다 일을 그만두면 멀어질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제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생각이다) 왜 사람들이 A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들 친해지고 나서는 셰프님들이 모여 사는 쉐어하우스에서 밤새 술도 마시고 파티를 했는데, A가 오지 않는 날에는 모두가 그리워했다. 술도 잘 마시고 분위기도 잘 이끄는 A는 모두에게 즐거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이었다. 헤헤 웃는 모습도 좋았다. 웃는 소리가 실제로 '헤헤헤'라고 전사될 것만 같았다. 사람은 자신이 못 가진 것에 대해 눈길이 가게 되어 있다고 누군가 그랬다. 곧 A가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고 나도 도시를 떠나 인연이 오래 이어지진 않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반대 성향인 데다가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다. A가 떠들고 웃는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지금도 어디선가 헤헤 웃으면서 주변을 즐겁게 해 주며 잘 살고 있겠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면 왕복 몇 시간 거리라도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다. 흘러가는 시간을 즐거운 대화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 분당 남자 친구가 연인을 데려다주는 데는 이런 애정 어린 마음이 있구나, 이제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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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nrad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