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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Mar 05. 2021

아기동자님 내 미래가 보이시나요

나는 누군가의 진단이 필요했었다


엄마 친구 중에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용하다는 무당은 다 찾아다니는 분이 계신다. 가정에 불화가 있다거나 딱히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속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그저 항상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다니시는 것 같다. 미래의 안녕을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 굿판을 자주 벌이셨는데 거기엔 우리 엄마가 자주 동행해야 했다. 정작 본인의 귀에는 굿에 심취한 무당어(語)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고 엄마는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는 능력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그저 산행을 가는 줄 알고 탑승한 승용차는 구불구불 산자락을 타고 안개가 내려앉은 굿판에 도착했다. 어린이가 갑자기 낯선 상황에 놓이면 당황할까 봐 엄마는 나에게 옆방에서 놀다가 나중에 궁금하면 나와 봐도 된다고 했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방울을 흔드는 무속인 그리고 그 입에서 주절주절 끊임없이 나오는 주술 같은 말이 이루는 광경이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곧 익숙해진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크게 무섭지도 않았고 나름 이런저런 재미도 있었다. 그 무속인은 굿의 막바지에 다다라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에게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고, 엄마는 부적과도 같으니 용돈으로 쓰거나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라고 했다. 


첫 시작을 굿판이라는 정통 샤머니즘(?)으로 시작했으니, 타로나 사주 등 미래를 점치는 온갖 기술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길거리에 늘어선 타로 노점에서 오천 원에 카드 몇 장을 뒤집으며 어느 대학교에 붙을지 묻고, 바쁜 학교-알바-과제 루틴을 소화하면서도 용케 비는 시간에 찾았던 사주카페 등등.. 그러다 퇴사를 한 이후부터는 점점 친구들과 사주를 보는 횟수가 늘어났는데, 신점이나 점성술 등 용하다고 소문난 곳에 내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 알음알음 찾아간 적도 많았다. 신년 사주는 새해가 됐으니까! 점성술은 신기하니까! 신점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몇 달도 되지 않아 그 내용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연말에는 내년 사주는 어디서 봐야 하나 고민하기 바빠 올해의 그 용한 점술가가 맞았는지 아닌지도 흐릿한... 돈 낭비인 건 잘 알지만 항상 끌리는 점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서 듣는 것이 내 눈빛을 반짝반짝하게 만든 것이다.



당신의 사주는 태양의 기운이 강하며 물을 멀리하고.. 
하나의 타로카드가 뽑는 족족 나온다는 것은.. 

이러한 특성을 타고 태어나서 이러한 성향을 보이고, 이런 것은 어떠한 이유로 잘 맞지 않고 등등.. 나를 알아가는 셈 쳤다. 심리테스트나 각종 검사도 같은 맥락에서 좋아했다. 과학적 근거는 없거나 적을지라도.. 나를 정의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몰라서', '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해결된다' 고 말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나 자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그 생각에 빠져버리니 무엇이 내 장점이고 단점인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흐릿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남의 입을 통해 나의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알았지!?'라는 신기한 마음에 '그래 맞아! 그게 내 특성이었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나의 이상과 나의 특성을 적당히 배합해주는 분석이 마음에 드니까. 요즘 인터넷에서는 취업 자소서를 너무 많이 작성하느라 더 이상 어떤 걸 써야 할지 모르겠을 때 자신의 MBTI나 사주를 검색해서 적당히 끼워 넣으면 된다는 꿀팁이 돌기도 하고, 마케팅용으로도 나를 의미하는 꽃, 술, 위인 등 각종 테스트가 쏟아져 나오는데.. 다들 혼란에 빠져 이런 검사가 자신을 정의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어딜 가든 나의 관심사는 재물운도 연애운도 아닌 '내가 장래 어느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였다. 내 언어로는 '나는 뭘 해 먹고 살까요'였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공운이었다. 딱히 성공을 바라지도 않고 그 일을 통해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저 내 운명이 적힌 책을 펼치면 나의 '천직'이 쓰여있을 줄 알았다나는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몰라 방황하는데 그 고민의 해결책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근데 아무도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당신의 운명은 '교사'입니다, '우주인'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보다는 두리뭉실하게 말해주는 것이 장사의 비법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 확실하게 '너의 운명은 이것이야! 정해져 있으니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돼!'라고 해 줬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 그 운명이 현재 내가 선택해서 가고 있는 이 길과 같은 방향의 답을 내놓는다면 '역시 용한 점쟁이군' 혹은 '나는 역시 똑똑하군, 나의 선택이 옳아'라고 했겠지만, 영 다른 방향 혹은 내가 싫어하는 방향이라면 청개구리처럼 '쳇! 네가 뭔데! 내가 운명을 바꿔본다! 돌팔이 점쟁이!'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내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것이고,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를 보고 운명을 점친다는 자들의 입을 빌어 그걸 찾으려 했던 것이다. 답정너가 따로 없다. 두꺼비처럼 앉아 눈을 뒤룩뒤룩 굴리면서 원하는 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비슷한 단어라도 나오면 날름 혀를 꺼내 잡아채고 내 것인 양 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엄마 친구가 그러셨듯 불확실한 현재를 지탱할 무언가를 찾으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무언가를 붙들려고 손짓을 해댄 것 같다. 


혹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첫 퇴사 이후에는 지쳐서 한동안 쉬어야만 했는데, 그때 나의 퇴사를 실패로 규정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제껏 부모님이 시키거나 선생님이 시킨다고 뭘 한 적이 없으니, 뭇사람들처럼 '내 인생을 못 살았어요', '이제는 남들이 원하는 거 말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예요'라는 말을 못 한다. 나는 이제까지 내가 선택한 내 삶을 살았는데,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그 기대에 대한 실패는 온전히 나 자신에 대한 꾸짖음으로 돌아와 나를 계속 작아지게 만들었다. 다시 마음을 먹고 무언가를 시작하더라도 또 실패로 이어진다면 그 아픈 과정이 다시 반복될까 봐 걱정했다.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무속인이든,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확실한 대답을 원했다.



하지만 또 실패해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원망하게 되면 그게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은 편할지라도,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생년월일이나 내 관상만을 보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삼십 년을 함께 한 나 자신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저 의사가 병명을 알려주며 약을 처방하듯, 미래를 본다는 전문가(?)의 입을 통해 내 진단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사주 보기를 건너뛰었다. 작년 초에는 인터넷의 발명에 박수를 보내며 카톡으로도 사주를 보고 심지어는 여기에서 점성술을 보기도 했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졌다. 내가 다시 도전하지 않는다면 운명의 책에 뭐라고 쓰여 있든 실패를 할 수 없고, 그러면 원망할 대상은 그 책을 읽어준 점술가가 아니라 또 내가 된다. 실패도 못한 실패자라고 또 나를 깎아내리겠지. 


아직은.. 뭔가에 다시 도전할 용기가 없다. 내가 만난 명리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십 년의 대운이 변하는 서른세 살까지는 이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코앞에서 새벽 먼동이 터오기 전 가장 깜깜한 곳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확실한 답 하나를 찾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나는 금방 지쳐버렸다. 빨리 그 답을 알게 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저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또 흘러가듯이 내가 뭘 해 먹고 살지도 알게 되겠지. 어떤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게 될지도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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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wy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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