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에 직진, 진심인 “숑”
그렇게 맛집 프로그램, 블로거, 유튜버가 많은데도… 한 때 제주도민인 내게 제주 맛집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니 여느 맛집 소개엔 안 나올지 모르겠지만, 서귀포에 살 때 즐겨 찾던 또 가게 되면 꼭 들르는 나만의 맛집이 있기는 하다.
우선, 시간 순서상 서귀포 도착과 거의 동시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찾는 ‘깡통’이라는 고깃집이 있다. 이중섭거리 중간 즈음 위치한 이 식당은 소위 관광식당이 아니라서, 관광객보다는 서귀포에 사는 20~30대 청년들,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붐빈다. 간혹 이중섭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들어오는 외국인이나 관광객들도 있지만, 주축은 지역 사회 사람들이다.
사실 제주 돼지는 백종원의 어쩌고 돈가스가 아니라, 아무 학교 앞 분식집 돈가스도 역대급이라는 게 정설일 만큼, 맛은 물론이고, 독특한 요리법을 자랑하는 식당도 많아 깡통은 그리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깡통은 나와 친구들이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찾던 곳으로, 누구와도 숯불에 구운 고기에 한라산 소주 한 잔, 일회용 은박 그릇에 끓인 라면과 너무나 어울리는 매콤한 무김치를 후루룩 쩝쩝 먹을 수 있는 소탈한 가게다.
그리고 내가 서귀포에 머무는 매일 저녁 들르는 참새방앗간 카페 메이비(May 飛). 이중섭거리 아래쪽에 한라 꽃방과 나란히 있는데, 커피와 간단한 요기는 물론, 맥주나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내 서귀포 친구들의 아지트이기도 한데, 감성적인 음악이 곁들여져 달밤이 더 행복해지는 곳이다.
다음날이 왔다. 여행을 어젯밤 숙취로 망치고 싶지 않다면, 자구리로 달려가 된장을 풀어 만든 해물 뚝배기를 주문하길 권한다. 한라산은 오르는 곳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정의와 정신, 실천이 살아 숨 쉬는 서귀포에 유명한 해장국집은 널리고 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숙취 끝에 이곳을 찾았던 이유는 풍성하고 개운한 맛도 맛이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자구리 한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에게 소개해서 단 한 번의 실패가 없었던 할망뚝배기. 아… 식전엔 이런 글을 쓰는 건 명백히 비윤리적이다.
만약 전날 숙취가 고통스럽지 않다면 우아하게 브런치를 먹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맛집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멀리 돌아온 느낌이다. 하지만 기대치 않은 먹방에 즐겁지 않으셨나. 이제 그림 산책을 해보자.
꽁떼네또르는 서귀포에서 1,100고지를 향하는 초입에 위치한 감성 브런치 카페. 스페인어로 컨테이너다. 제주에는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인스타용 카페가 많지만, 사실 그런 곳은 계속 찾게 되진 않는다. 제주에 살 때 몇몇 도민과 브런치 모임으로 처음 방문한 뒤, 생면으로 만든 매콤한 고등어 오일 파스타와 깊고 진한 여운을 주는 커피, 그리고 매력적인 이 녀석 때문에 제주를 찾을 때마다 들르는 곳이 되었다.
녀석은 바로 숑이다.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운 강아지도 한 번 그려본 일이 없는 내가 브런치 카페의 강아지를 그리다니, 주변에 널린 그림 그려달라던 캣맘들의 야유가 들리는 것만 같다.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육지는 물론 제주에도 무척 많다. 어떤 이유인지 난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들과 잘 지내는 편이다.
서귀포에서 30분 한적한 길을 달려 숲 속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서면 숑이 우리를 맞아준다. 테이블 주변에 머물며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묻곤 한다. 물론 다른 테이블 손님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하지만 그마저도 음식이 나오는 그 순간 직진하는 숑, 음식 앞에 진심인 녀석이다.
꽁떼네도르 주인장 말씀에 따르면, 숑이는 나이가 많기도 하고, 성인병도 있어서 사료 외에 다른 음식을 먹어선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 애잔해서 녀석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음식 먹기를 잊어버리는 상황도 마주했었다.
하지만 카페 주인장이 다른 음식을 내놓는 순간 녀석은 다시 궐기해서 진심을 발현하기 위해 다른 테이블을 향해 직진한다. 그리고 또 진심을 다해 바라볼 것이다.
지난봄, 벚꽃이 한창일 때 오랜만에 꽁떼네또르를 찾았다. 떨어지는 벚꽃을 맞으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숑이를 보니, 진짜 봄이 왔구나 싶었다.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봄 맞는 숑이 진짜 봄으로, 행복이라는 영역으로 나를 옮겨다 주었다. 이 녀석은 벚꽃에도 진심인 모양이다.
평소 돌봄의 DNA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동물은커녕 반려식물도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단, 나를 도와주는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같은 반려 전자제품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숑이 이 녀석을 만날 때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보는 건 어떨까 잠깐 생각하게 된다. 물론, 치명적 알러지, 주말부부라는 거주환경, 부족한 돌봄의 DNA에 이르기까지 재빨리 정신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 시간을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 봄, 나는 숑이를 그려보기로 했다.
내게 숑이 사진은 꽤 여러 장이다. 만날 때마다 찍었으니, 어느 사진 속에서나 귀염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녀석. 어떤 모습을 그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녀석의 눈빛에 기대 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녀석과 함께 있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의 눈빛이 전해지며 오랫동안 행복했다.
요즘은 반려견, 반려묘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초상화를 작가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이 그림은 숑이는 물론, 카페 주인장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내 맘대로 찍고 그렸음을 밝힌다. 언제쯤 카페에 들려 숑이와 주인장에게 이야기해야 할 텐데, 제주에 가야, 꽁떼네또르에 가야, 숑이를 만나야 이야기할 수 있는데 말이다.
깡통에서 시작해, 메이비, 할망뚝배기, 꽁떼네또르까지 나열하고 보니, 다시 서귀포에 와 있는 것만 느낌이다. 더군다나 봄 맞은 강아지 숑이를 그리는 동안은 내 마음에도 봄이, 꽃이 머물렀다. 봄꽃과 어우러진 숑이를 보고 있자니 내가 머무는 이 삭막한 산업도시와 한라산 자락 숑이가 머무는 공간이 이어진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이 녀석이 언제나 호기심에 직진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나 역시 진심인가숑, 아니 진심이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