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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Aug 31. 2021

얼마든지 아플 수 있는 권리

직장인에게 그 권리는 정녕 사치인가

나는, 참 튼튼하게 생겼다.

두번째 취업했던 회사에 처음으로 출근하던 날,

듣도보도 못한 동네 술취한 아저씨같은 상사는 위아래로 나를 훑으면서

"통통하네, 얘는 제법 힘좀 쓰겠다. 그치? 술도 잘먹게 생겼어. 

 아 그 여자 과장 사무실에 옷있을거다. 아닌가, 걔는 좀 너무 뚱뚱해서 너한텐 크려나?

 일단 한번 입어봐라."

라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


고3때는 1년동안 무려 8kg를 증량하는 기함을 토해내면서

pig of pig가 되었던 기분이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아빠가 '우리집에 장미란이 산다.'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본인 배가 평생 훨씬 더 뚱뚱했다.)


여튼, 튼튼하게 생겼다는 말이다.


애석하게도 내 몸 안은 그리 튼튼하지 못하다.

물론 어떤 중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중학교때 전교에서 한두명씩 조회를 서다 쓰러졌다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였고

저혈압때문에 대학교때 목욕탕을 나서다 한번 쓰러지고 바나나 우유도 못먹고 실려가고

밥을 굶고 공부하다가 도서관에서 휘청하던걸 지나가던 선배가 우연히 보고 살려냈고

직장에서 교대근무하다가 최고혈압이 50까지 떨어지는 초저혈압으로 응급실에 두어번 실려갔다.

생리통은 또 한번씩 어찌나 심한지, 그날 출근하는 나의 심정은

사자앞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발 묶인 약해빠진 토끼가 된 기분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쓴소리 한방 하면 그날은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창피해 죽겠는데 그게 또 내맘대로 조절도 안되는 몸을 타고났다.(노력은 한다는 얘기다)


사실 말하자면

"정신이 약해지면 몸이 쉽게 영향을 받는 체질이다."

라는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몸만 아플때는 생각보다 잘 이겨낸다.

재깍재깍 병원도 잘 가는 편이고, 의사선생님 시키는대로 식단관리든, 약이든 꼬박꼬박 잘챙겨먹는다.

저혈압에 라면국물이 좋다길래 라면국물을 따로 먹어보기까지 했으니 말을 잘듣는 편이라 해도 맞지않나?

(그게 진짜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이 찌면서 혈압이 다시 정상범위로 돌아왔다.)


문제는 정신적으로 힘들때다.

사람과의 갈등이 있거나, 새로운 업무가 과중하거나,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껴 부담을 느끼거나,

프로 불면증 환자면서 잠을 잘 못잤을 때나, 내가 원하거나 계획했던 중요한 일이 틀어질때면

언제나 몸이 많이 아프다.


그럴때면 진짜 사실, 다 놓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든다.

이놈의 직장이 뭐라고, 이놈의 인생이 뭐라고, 당장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뭐하러 사나, 

하는 생각이 수면위로 떠올라 가라앉을 생각을 않는다.


하, 문제는 직장에 발이 꽁꽁 묶여있다는 거다.

더 큰 문제는 평생 주입되어온 '첫째 딸이 집안을 먹여살려야한다.'라는 말의 책임감

내가 그 족쇄에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꽉 잡고 있다는 거다.

이에 더해 얼마전에 대출받은 어마어마한 주택담보대출은 어쩔 수 없이 직장으로 발을 향하게한다.


도망치고싶다.


왜, 요즘 유행이지 않은가.

'내가 버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도망쳐라'

'남들 보다 늦어도 된다 쉬어가자.'

'남들이 뭐라하건 나부터 챙깁시다.'

라는 온갖 힐링 명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나도 그 중 하나이고 싶다.

예전엔 그런 책을 읽기만 해도 잠시 도망치는 느낌이라 자주 읽었는데,

이제는 '어차피 나는 도망도 못치는 상황인데 열받게 뭐라는거람.'싶어 멀리한다.


도망칠 수가 없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실패와 멈춤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는 듯 하다.

직장에서 한번 '우울증' , '몸이 약하다.'라고 찍히는 순간, 무리에서 밀려나는 건 한순간이다.

그 소문은 또 어찌나 빠른지,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나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던진다.

내가 실제로 얼마나 성실하든, 일을 잘하든, 일이 빠르든, 나름 인간관계를 잘 맺든,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더이상 궁금해하지조차 않는다.

그저 '쟤가 우리팀에 오면 안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저럴거면 일을 그만두지 뭐하러 직장에 다닌담.'하는

이야기를 해서 내 귀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나 아프지 않은가.

'우울증'은 요즘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데, 그놈의 '우울증'한번 앓았다고 하면 무슨 전염병 옮는 것 마냥, 

절대절대 회복하고 나아질 수 없는 것 마냥, 그렇게 사람을 안쓰럽게, 혹은 혐오하며 바라본다.

본인에게는 절대 그렇게 아플일이 없다는 듯이,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아픈사람들에게 그렇게들 함부로 한다. '아, 오늘의 안주거리를 잡았다.'싶었는지 대차게 물어뜯는다.


병원에 지속적으로 갈 일이 생기면, 연차 갯수부터 걱정해야한다.

분명히 사규에는 '병가'가 있지만, 사용하려 하면 '모양새가 안좋다.'라는 되도안한 사유를 대면서 결재를 해주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을 다 하고나서 쓰는 병가도 안되는 모양이다.

그냥 아프다고 병원가는 것 조차 쉬고 농땡이 피우는 것 같아보여 눈꼴사나운 것 밖에 더되는가.


아프면, 언제든지 쉬었다가 올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언제든지 다시 회복해서 돌아왔을때, 

환영받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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