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by 가을장미

공휴일 오전이었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현충일! 나도 모르게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묵념은 이내 기도가 되었고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부모님을 떠올렸다. 부모님 뿐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고하고 피 흘린 선열들 덕분에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함에 감사가 절로 나왔으니까. 가정의 달인 오월이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전하는 달이라면, 유월은 좀 더 그 사랑의 관심을 나라로까지 넓히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십여 년, 하지만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셔서도 여전히 우리 형제 모임의 중심엔 그분들이 계시는 것만 같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란 죽음조차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나의 뿌리 같은 존재인가. 지난 몇 해는 코로나로 부모님 기일에도 형제들이 모여 추도예배조차 할 수 없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청춘의 때에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아버지, 그 후유증으로 몇십 년이 지나서도 악몽을 꾸며 잠에서 깼다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철부지 시절엔 좀 더 멋진 남의 부모를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입이 다물어졌고 그분들의 땀으로 이룬 지금 우리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는 것만도 행운이라 여겨진다.


책을 읽다 보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두 기둥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문학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겨났다. 서양 최초의 서사시,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그 근저에 있었다. ‘일리아스’는 신의 뜻에 따라 트로이 전쟁을 수행하는 그리스 군과 트로이 군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었다. 오랫동안 구전되어오던 이야기들를 호메로스가 집대성했다는데 십여 년에 걸친 전쟁을 단 오십일의 여정으로 압축하고 아킬레우스라는 그리스 영웅의 ‘분노’라는 감정을 키워드로 한 그 구성에 감탄했다. 전쟁과 죽음,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방대한 시는 본문보다 더 많은 각주와 신들과 영웅들의 이름을 외우기도 어려웠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원문에서 시적 운율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문학의 형태가 처음에는 이런 서사시의 형식으로 암송하거나 노래로 시작해 구전되다가 점차 서정시로 발전했고, 희극과 비극 시로 연극화되다가 그 뒤 소설과 에세이로 발전했다는 그 흐름을 안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일리아스’의 두터운 책을 펼치고 그 행을 따라가며 보기만 해도 수천 년 전 인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헸고 의미가 남달랐다. 비록 내가 제대로 이해를 하긴 어려웠음에도.


수천 년 전의 인간도 영원불멸의 신을 동경하며 필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신들을 찾았으리라. 그래서 신화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올림푸스의 제우스를 비롯한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을 그렸다. 영웅들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다가 마침내 받아들이며 자신의 공동체인 나라와 가족 그리고 명예를 위해 죽음조차 넘어서는 이야기를 통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찾아가는 신과 인간 여정을 다루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가치관을 엿본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이란 한계상황을 다루고 있기에 내겐 너무 잔인한 묘사가 버겁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가 트로이 전쟁을 기억하고 또 회자되는 이유는 두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은 자신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그리스의 아킬레우스 혈통이라면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제2의 트로이 전쟁으로 명명하며 백성들을 단합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그 정복지에 다수의 도시를 건설하며 동서 교통과 경제 발전에 기여해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다.


또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자신들의 로물로스 신화가 너무 빈약함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들이 무너뜨린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에 대한 열등감으로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를 등장시켰다. 그는 트로이가 함락되자 가족과 유민을 이끌고 지금의 이탈리아 중부 로마에 정착했다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이 그리스와 경쟁해서 십 년 동안이나 흔들리지 않고 버텼던 강력하고 문화적으로 뛰어난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면서 로마의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로스 신화에 트로이를 결합시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인물로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일리아스’는 단지 신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라는 거대한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지금도 많은 브랜드 명을 살펴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헤라, 헤르메스, 시리얼 등 일상의 상품명에서 아폴로, 우라늄, 플로토늄 등 우주선이나 원자폭탄 이름, 그리고 아킬레스건, 나르시시즘, 패닉 등 심리 용어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즐기고 배웠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증거겠다. 세계화 시대에 동서양이 서로를 이해하고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양 고전의 뿌리를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파트로크토니아’라는 친부 살해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동양의 사상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인간의 감춰진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신들의 모습. 제우스도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권력을 움켜 쥔 최고의 신이 되었다. 알고 보니 친부 살해에 들어있는 심오한 뜻은 기성세대가 쌓아놓은 틀에 젊은 세대가 안주하지 말고 그것을 깨면서 자신들의 세대를 만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사상은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니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정신을 모르면 서양 문학작품의 깊은 뜻까지는 알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불화의 여신이 던진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라고 쓰인 글로 시작된 트로이 전쟁. 제우스가 태어난 그리스의 크레타 섬. 유럽 문명의 발생지인 그 섬은 아직 나의 로망으로 남겨놓는다. 사하라의 뜨거운 모래 먼지를 싣고 시로코가 불어오는 그곳에서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문학의 뿌리가 된 신화를 반추해 볼 그날을 고대하면서.

작가의 이전글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