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여운 것들' 리뷰
(※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은 하나같이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다. 그리고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도 갈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신작인 '가여운 것들'도 같은 궤를 띤다. 기괴하고 독한 면이 강하지만, 인간의 본면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들고 동시에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의 여정을 응원하게 만든다.
천재 외과의사, 혹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불리는 갓윈 벡스터(윌렘 대포)의 손을 거쳐 벨라는 태아의 뇌를 장착하고 다시 태어난다. 탄생의 비극을 모른 채 그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삐뚤빼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다. 어떠한 편견이나 좌절, 자기혐오에 갇혀 있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말이다.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유혹을 덜컥 받아들이면서 벨라의 기묘한 여정이 시작된다. 리스본부터 파리까지 여행하는 동안 덩컨은 모자라지만 아름다운 벨라를 탐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을 훨씬 빗나가는 벨라의 매력에 되려 덩컨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한순간에 머저리로 전락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최후를 지켜보게 된다.
잠을 잘 때마다 성장하는 벨라는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발칙하다. 파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섹스를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 매료돼 자발적으로 사창가에 취업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이 ‘생산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포주(캐서린 헌터)에게 직접 매춘 여성이 고객을 고를 수 있는 제도를 제안해 그야말로 '거침없다'.
이 지점에서 관람객 일부는 여성혐오로 판단하며 호불호가 갈리긴 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벨라의 '선택'이다. 그의 여정과 선택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벨라가 거부하는 '사회적인 통념'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성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이라는 틀 안에 길들여진 대중에게 성적 욕구를 드러내고 충족하는, 즉 주체적인 여성 벨라가 불편한 존재일 것이다. 영화는 벨라를 향한 관객의 시선 안에 담긴 통념이란 '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건드린다. 또한 영화 속 배경이 19세기 유럽사회인 걸 감안하면 벨라의 행보는 가부장제를 뒤흔들었다.
벨라의 성장과 함께 맞춰나가는 색의 확장으로 연출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갓윈의 집 안에만 있던 벨라의 삶을 좁은 어안 렌즈에 흑백화면으로 표현했다가 그녀의 모험이 시작됨과 동시에 탁 트인 컬러 화면으로 전환된다. 여기에 초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스팀펑크 배경과 어우러져 기묘한 기운이 강해진다.
재밌는 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들과 달리 '가여운 것들'은 약간 다른 결을 그려낸다. '더 페이버릿', '더 랍스터', '킬링디어'만 하더라도 많은 인물들이 어리석음과 나약함으로 무너지는 비극으로 향하지만, '가여운 것들'의 세계관은 제법 낙관적이다. 벨라는 자유의지로 통제하며 사람들로 인해 타락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성장한다. 부조리한 세상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 시작과 달리 영화 말미에 다다랐을 때, '가여운 것들'이 벨라에서 벨라를 제외한 모든 인물로 바뀌는 것도 이 여파일 것이다.
벨라를 기괴한 괴물이 아닌 끝까지 신뢰하는 인물들도 있는데 이들이 과학자라는 점도 흥미롭다. 벨라의 아버지 격이자 그녀가 '신(God)'으로 부르는 갓윈은 고통을 이성적 사고로 견뎌내려고 한다. 온몸이 수술 자국들로 가득하지만, 원흉인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세상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갓윈의 제자 맥스(라미 유세프) 또한 벨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순수 관찰대상으로 벨라를 처음 접했던 맥스는, 격정에 빠져 추락하는 덩컨과는 다르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재회한 엠마 스톤은 '더 페이버릿'에 이어 '가여운 것들'에서 비범한 연기력을 펼치며 관객들을 압도한다. 벨라의 성장과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 그의 열연이 이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시간의 흐름과 성장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벨라의 걸음걸이 및 말투까지 포착해 자연스레 담는다. 골든글로브·영국 아카데미를 포함해 여우주연상만 26개를 거머쥐었고 '2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유력'이라는 예측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다양한 배우들이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마크 러팔로가 개인적으로 눈이 갔다. 다양한 작품에서 입체적인 연기력을 펼친 베테랑 배우인 건 잘 알려져 있긴 하나, 한동안 MCU 헐크에 눈이 익었기 때문. 한순간에 추락하는 바람둥이 덩컨을 연기하며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를 노련하게 이끌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