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을 통해 본 인간의 의심과 무력감
의심이라는 녀석은 인간에게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굳건할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뒤흔들고 현혹하는 간사한 존재다. 이 의심이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종교 등에 의지해 신앙심을 키우고, 어떤 이들은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식으로 내재된 불안함을 다스린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의심을 말끔히 떨쳐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반면, 믿음이라는 장벽에 조금이라도 물 샐 틈이 보인다면 의심이 쥐도새도 모르게 새어 들어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리고 낚아버린다. 나홍진 감독이 만든 '곡성'도 이러한 사람의 특성 중 하나인 의심이라는 요소를 영리하게 사용했다.
장르 소개란에는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라고 적혀 있다. 엑소시즘과 샤머니즘 소재가 나오기에 오컬트에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정확하게 스릴러와 오컬트 요소가 아주 진한 색깔을 내기 때문이다.
156분 동안 진한 스릴러와 오컬트 향을 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 장면에 음산한 배경과 함께 나오는 성경 구절 루카 복음서 24장 37~39절로 함축했다. 이 문구가 요약본이라는 것을 다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과 살은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으니라. -루카 복음서 24:37~39-
전라남도 곡성군 한 시골마을에서 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살인 현장에 출동한 종구(곽도원)와 경찰들은 수색하던 중 창고 깊숙한 곳에서 새 둥지와 비슷한 나뭇가지 뭉치와 촛불이 놓인 수상한 제단을 발견했다. 살인사건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정체불명의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마을 사람들 눈에 띄었고, 그와 관련된 소문들이 돌았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라는 대사는 종구의 의심은 외지인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그에게서 해답을 찾겠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공식수사에서 사건 발생 원인이 독버섯이 일으킨 환각작용이라고 밝혔음에도 종구와 마을 사람들은 이에 귀 기울이지 않고 외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의심에 현혹된 것이다.
여기서 종구는 사람들이 전하는 여러 가지 소문만 듣고 일본인 외지인을 만났다. 소문 덕분에 그 외지인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상으로 적용한다면, 외지인을 향한 종구의 생각이나 마음처럼 무언가에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혹은 일상서 벌어지는 현상 등을 이해할 수 없다. "쟤는 아마도 그럴 거야" 같은 사실에서 기반한 의심이다.
외지인을 향한 의심과 경계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종구 일행은 그가 부재중인 틈을 타 집을 수색하던 중 괴이한 재단과 죽은 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발견했다. 여기에 효진의 실내화까지 보며 종구는 외지인을 향한 의심이 강해졌다.
때마침 효진에게 일어나는 이상증세와 상흔을 발견하며 이 또한 외지인 때문이라 단정 짓고 그의 집을 부수고 개를 죽이는 등 마을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효진의 증세는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결국 장모와 함께 일광(황정민)을 불러 무당굿을 했으나, 종구 가족이 원하고 바랐던 결과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면서 '곡성'은 외지인뿐만 아니라 무당 일광, 그리고 종구에게 경고했던 무명(천우희)의 존재 및 이들을 대하는 종구의 생각까지 모두 의심스러워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일본에서 온 외지인 못지않게 무명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끔 만든다. 무명 또한 외지인처럼 사람을 현혹하게 만드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종구에게 돌을 던지면서 살인사건을 목격했다고 하질 않나, 일본인 시체를 가드레일 밖으로 던지는 종구 일행을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켜봤다. 또 일광을 견제하며 "여긴 뭣허러 온겨? 가!"라고 쫓아냈다.
하이라이트는 일광과 무명의 말에 종구가 갈등하는 장면. 일광은 무명을 믿지 말고 집에 가라고 하는 반면, 무명은 자신을 믿으라며 닭이 3번 울기까지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종구는 무명이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동시에, 무명이 있던 장소에 효진의 머리핀이 떨어있음과 무명이 피해자들의 옷을 걸치고 있음을 발견해 무명의 말의 진위를 의심했다. 세 번째 닭이 울기 전 집에 뛰어간 종구는 일가족 모두 죽은 현장을 목격하고 쓰러졌다.
무명의 말대로 따랐다면 무사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광의 말도 일리는 있다. 당장 집에 갔으면 사건을 예방했을지도 모른다. 또 무명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됐던 부분들이 많았고, 그가 선인지 악인지도 불분명하지 않았던가. 그가 효진을 알고 있으며 "그 아이의 아비가 지은 죄"라고 논한 것도 의심에 현혹되기 충분했다. 이를 보고 무명을 악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외지인과는 다르게 "쟤가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다.
나홍진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마지막 장면까지 관객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가톨릭 부제 이삼(김도윤)과 외지인의 투샷을 두고 또 한 번 혼란을 줬다. 특히 외지인은 도입부에 인용된 루카 복음서 내용을 대사로 언급하며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유발케 했다. 이에 대해 나홍진 감독은 매체 인터뷰 등을 통해 정답을 공개했으나, 그 답안을 확인하기 전에는 'SKY 캐슬'의 김주영(김서형)의 유명한 대사처럼 "의심하고 또 의심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홍진의 답변을 찾아보지 않는 게 '곡성'을 즐기는데 더 좋다고 생각한다.)
외지인 혹은 무명을 향한, 이삼이 동굴에서 본 것, 그리고 '곡성'을 대하는 의심은 결국 영화 속 대사처럼 어쩌다 낚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즉, 이유 없이 의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하필 많고 많은 이들 중 내가 선택받은 것이다. 일광은 이를 우연의 연속으로 혼돈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무명은 종구가 맞이한 비극은 그의 업보라고 단정 지으며, 이는 하나의 질서처럼 표현한다. 이 또한 누구 말이 맞다고 생각 들면, 상대편의 말 또한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 속에서 인간은 무기력함과 공포를 드러내며 무지의 폭력에 휘말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의심 때문에 무력하고 무지한 이가 할 수 있는 건 의심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믿고 의심해야 할까. 이것이 '곡성'이 전하고자 하는 의심의 무서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