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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Jul 02. 2020

도둑은 세상에서 가장 낙천적이다 <종이의 집>

Netflix 메가 히트 케이퍼물 시즌 1,2

*스포일러 있음


예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봤다! 하드한 범죄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계속 미뤘는데, 막상 보니까 처음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리 형형색색의 감정들이 뭉텅뭉텅 묻어있는 드라마 장르였다. 역시 인기 드라마인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교수와 8명의 도둑들 도쿄, 리우, 나이로비, 덴버, 모스크바, 베를린, 오슬로, 헬싱키가 닷새간 벌이는 조폐국 털이! 그중 메모할만한 셀링 포인트들을 짚어봤다.


끊임없는 관계 재편

처음엔 단순한 두 개의 관계만 존재한다. 범죄자, 아니면 인질. 내 편, 아니면 네 편. 범죄자는 인질을 통제하고 인질은 범죄자를 무서워한다. 그러다가 새로이 생성되는 연결고리들이 관계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범죄자 나이로비는 인질 모니카를 협박하던 중 '미혼모'라는 연결고리를 감지한다. 자신도 마음에 품은 자식이 있었기에 그녀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범죄자-인질' 영역에서 다른 편에 섰던 그녀들이 '엄마'라는 연결고리로 같은 편에 서게 된 것이다.

 

마치 전기분해 화학식 같다.

2H2O → 2H2 + O2

H2O로 뭉쳐있던 그룹에 전기자극(미혼모, 부모, 자존감, 어린 시절 등)을 가하면 H2와 O2라는 새로운 그룹으로 나뉘고, 원소들은 또 다른 자극에 따라 결합하고 와해되기를 반복한다. 모스크바와 모니카 역시 '부모'라는 연결고리로 유대감을 느끼고, 나이로비는 앨리슨에게 '자존감'을 가르쳐주며, 리우는 앨리슨에게 '어린 시절'이야기를 들으며 연결된다. 알고 보면 엄마를 잃은 슬픔을 가지고 있다든지, 비슷한 병을 앓는다든지 하는 내밀한 공통점은 순식간에 표면적인 상하관계를 무너뜨린다. 



유대가 있으면 분열도 있는 법. 분열은 정보량과 공유 여부의 차이에서 온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수집한 개별 정보를 바탕으로 일반론을 이끌어내려는 본성이 있다. 그 과정에서 엉뚱한 추측이 나오며 갈등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베를린은 유일하게 교수와 '체르노빌 작전'을 공유한 사이다. 나머지 멤버들은 정확한 프로토콜을 모른다. 때문에 조금씩 쌓여 온 불신, 배신감, 서운함 등이 결국 도쿄의 러시안룰렛으로 팡 터져버리고 만다. 혹은 경찰 측에서 리우에게 부모님 영상을 보내 배신의 씨앗을 심거나, 나이로비가 덴버의 옷 주머니에서 떨어진 비밀쪽지를 발로 밟아 감추기도 한다. 


케이퍼물에선 끊임없는 관계의 전복과 재편이 셀링포인트다. 특히 범죄자가 인질 편이 되기도 하고 인질이 범죄자 편이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그룹이 똘똘 뭉치지 않으니까 더 재밌다. 아마 혹평을 받았던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관객들이 기대했던 바였을 것이다. <종이의 집>은 애초에 범죄자와 인질에게 다 똑같은 가면의 씌워서 경계를 흐리니 어느 정도 극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나중엔 다들 지쳐서 누가 범죄자고 인질인지 구분도 안 갈 지경이며 거의 전우애가 생긴다. 


같은 맥락에서, 너무 뻔한 관계는 조심해야 한다. 파트 2 뒤쪽으로 갈수록 덴버-모스크바 부자지간의 정이라든지, 라켈경감-교수의 러브라인이라든지 예상 가능한 화면들이 많아서 휙휙 넘겼다. 이미 예상 가능한 감정은 궁금하지 않다. 도쿄-앨리슨-리우, 조폐국장-모니카-덴버, 베를린-아드리아나 등 새로운 조합의 경우 관계가 어떻게 틀어질지 몰라 지켜볼 수 있었다. 


내편.doc → 내편_수정.doc → 내편_수정2.doc →내편_최종.doc → 내편_진짜최종.doc → 내편_진짜진짜최종이거임.doc →내편_파이널.doc


나레이션

1화가 시선을 잡아 끈 이유는 나레이션이다. 긴박한 범죄 현장에서 범인이 하는 생각들을 엿볼 수 있어 흥미진진하다. 특히 도쿄는 몸으로는 액션 신을 선보이면서 머릿속으로는 자꾸 딴생각에 빠져든다. 이 그룹에 여자가 더 필요하다고 구시렁거리고, 어젯밤 받은 청혼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며 감상에 젖는다. 사실 시청자는 범죄자에게 적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이토록 인간적인 머릿속을 들여다보니 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시청자와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종이의 집>은 치밀한 작전보다 집단 내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범죄 드라마다. 

사사로운 감정이 대놓고 끼어들기 때문에 재밌다. 

 우리의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는 듯했지만 모든 게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유는… 단순 사랑이야기였다. 사랑은 모든 걸 망치는 주범이 되곤 하니까.

하이스트 무비는 이미 결말을 알기 때문에 (=돈을 털고 떠난다) 함께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잘 그려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레이션은 극 몰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8명의 도둑들 중 가장 불나방 같은 도쿄가 나레이션을 맡은 게 최선의 선택이겠지 싶었다. 적당히 비관적이라 듣는 재미가 있고, 사실상 극을 진전시키는 동적인 캐릭터라 시청자에게 심리 설명을 상세히 할 필요도 있었다.



강한 여성 캐릭터

특히나 베를린에게서 성차별적 발언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분명 <종이의 집> 여자 캐릭터들은 자존감이 높고 섹시하다. 아래 세 장면은 라켈 경감, 나이로비, 도쿄 세 여자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들이다.


<킬링 이브>의 빌라넬에 열광했던 이유는 동물적인 본능을 가감 없이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캐릭터가 아드레날린을 내뿜는 모습은 이제껏 잘 볼 수 없었어서 그 신선함에 호감을 느낀 것 같다. 최근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서예지가 선보이는 캐릭터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위 장면의 라켈 경감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매력이 확 느껴졌다. 이 캐릭터를 좀 더 강하게 살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게임을 즐기는 침착한 천재 교수와, 그 수준에 맞는 똑똑한 싸움 상대 라켈 경감. 위와 같은 숨겨진 광기가 많이 흘러나오지 않아서 좀 아쉬웠었다. 특히 중요한 순간만 쏙쏙 골라 전화를 안 받고 나죽여주쇼 하면서 조폐국 앞으로 나서는 장면은 뭘까 싶었다.


나이로비는 <종이의 집> 통틀어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다. 지도자가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할 때 나서서 권력을 휘어잡을 만큼 결단력이 높지만, 권력 욕심은 없기에 어느 정도 정비되었을 때 다시 자리를 넘겨준다. 인질들을 가장 인간적이고 공정하게 대하면서도 자신의 본분을 넘어서지 않아 사리분별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똑똑하고 믿음직한 동네언니 스타일.


그런가 하면 도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매력이 있다. 도쿄가 나오면 거의 화면을 안 넘긴다. 그녀가 하는 표정, 말, 행동들이 다 강렬하다.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캐릭터가 있어야 조마조마하면서 재밌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욕을 많이 먹어서 좀 놀랐다. 직설적인 도쿄보다 오히려 교활한 베를린이 훨씬 밉던데... 특히 도쿄는 돌아이 같지만 위기 상황에서 판단과 기지 발휘가 빠르고, 팀을 구하기 위해 배짱이 두둑한 움직임을 보여서 좋았다. 도쿄가 처음에 1인칭 화자로 꽝꽝 박혀서 너무 편파적으로 봤나...?


번외로, IT 천재 리우를 막 어둡거나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폭탄머리로 묘사하지 않아서 좋았다. 덕후도 친절하고 귀여울 수 있다. 그게 캐릭터상 훨씬 매력적이다.



침착하고 치밀하지만 허당끼 있는 귀요미 대장

처음에는 조폐국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어떻게 20편이 넘는 이야기를 뽑아낼까 했는데, 교수가 있기에 가능했다. (물론 경찰 내부의 인물도 주요 인물군으로 두어서 조폐국과 상호작용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는 점도 있다) 중요한 포인트는 범죄자 중 외부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인물이 한 명 (=제한적) 있다는 설정이다. 10년 간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계획을 세워놔서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교수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다. 범죄자 우두머리인데 사람이 상당히 소프트해서 이상하게 정이 간다. 애초에 규칙 1번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이다. 그의 목표는 단순명료하다. 가능한 한 시간을 끌어 돈을 찍어내는 것. 10년의 계획이 있었지만 당연히 변수도 있다. 경찰이 대응하는 상황이나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처하고, 계획을 바꾸고, 목숨 걸고 떨면서(ㅋㅋㅋ) 증거를 인멸한다. 심지어 계획에 없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캐릭터의 매력도, 상황의 쫄깃함도 배가된다.



구성상 메모해둘 점은 항상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이다. 탈출하려는 인질 집단- 분열하는 범죄자 집단. 혹은 경찰 쪽 이야기- 도쿄와 리우의 관계 등. 덕분에 지루함을 줄일 수 있다. 또, 아주 가끔씩 완전히 범죄자들 편에 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밉상 인질에게 이런 대사를 부여해준다.

우리가 탈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요? 우릴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줄 알았느냐고요. 1천 번도 더 탈출하려 했을 거예요. 나는 여기로 출근했어요. 여느 아침처럼. 누구도 해치지 않고 내 일을 하러 왔죠. 누가 착한 사람 같나요? 당신들이요?

늘 섣불리 행동하고 자기 목숨 하나 지키고자 동료들을 배신하는, 한대 콱 쥐어박고 싶은 조폐국장 놈이지만 이 대사를 읊어주니까 또 확 균형이 잡혔다. 그래, 그래도 범죄는 범죄지. 범죄자 편에 서서 풀어가는 서사는 한 번씩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극 통틀어 가장 재미난 관점.

도둑은 사실 세상에서 가장 낙천적이다.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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