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시작 전 여행이 끝나다
여권을 집에 두고 왔다. 공항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믿기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여권을 빠뜨리다니. 아무리 정신없었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스스로를 계획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더 그러했다.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항상 출발 전에 필요한 물품을 점검했었다. 정신없는 일정에 밀려 자연스럽게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 어쩌면 바쁘다는 핑계로 여권만큼 중요한 인생의 무언가를 두고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들었다. 잊어버린 건 무엇일까 생각해내야만 한다.
다행히 쉬는 날이었던 아빠에게 부탁해서 여권을 받았다. 간신히 체크인을 하고 숨 돌릴 틈 없이 곧바로 수속을 밟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탑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초조했다. 발을 동동 굴렀다. 기다리는 건 무엇보다 견디는 힘든 일이다. 길고 긴 기다림 속에서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 기다리는 걸 못하다니 얼마나 모순적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다잡았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려 애썼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짝 한 발짝 아주 조금씩 천천히 움직였다. 속도는 느리지만 제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항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현재 위치를 침착하게 설명했다. 돌아온 답변은 냉정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비행기 탑승이 어려우니 수속을 밟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아차 싶었다. 기지를 발휘해서 바로 근처라고 말했다면 기다려준다고 했을 수도 있을 텐데, 조금 더 눈치껏 행동했어야 했다. 아무리 간절히 부탁해도 직원의 입장은 완강했다. 고객 한 명 때문에 모든 승객을 기다리게 할 순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항공사는 연착 문제로 자주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고객의 실수는 절대 용납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억울했지만 늦게 간 것은 내 잘못이다. 내로남불 대응에 화가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일행은 비행기가 연착되어 아직 이륙하지 않았다고 말해줬다.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게이트로 향했다. 공항 내부를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출입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문은 닫혔다. 아무리 애원해도 규정이라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직원은 자신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렸다면 시간을 훨씬 절약할 수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터벅터벅 직원과 함께 공항 입구로 돌아갔다. 스스로의 미련함을 탓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를 위해 행동했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 시도해 보는 건 나쁜 게 아니다.
가장 빠른 비행 편을 예매했다. 입국 수속을 모두 밟고도 두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그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혹시 목마르세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는 목이 마른 데 혼자 사러 가기 어색하다며 함께 커피를 사러 가자고 넉살 좋게 웃었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가보기로 했다. 음료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비행기를 놓친 사람이기도 했다. 그 또한 우연히 비행기를 놓쳐 다시 공항 입구로 돌아갔고,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상황에 옆자리에 우연히 내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우연이 거듭되면 운명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 예상 시간보다 여섯 시간 늦게 일본에 도착했다. 비록 일정은 틀어졌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인연도 만날 수 있었다. 혹여나 일본에 가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초초했기 때문에 도착한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일본 냄새가 났다. 고향에 온 듯해서 반가웠다. 앞으로 계획된 여행보다 오히려 일본에 가는 여정이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계획이 다 무너지고 혼자 남았을 때 진정한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한 순간 여행은 종료되었다. 진정한 여행은 길을 잃을 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