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정빈 Sep 22. 2017

멜로가 되지 못한 스릴러

영화 '분노'

 이상일 감독의 '분노'를 스릴러 영화로 부르는 건 합당하지 않다. 부글부글 끓다가 끝내 폭발하고마는 이 작품을 굳이 특정 장르로 구분하자면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 스릴러로 태어났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만들고보니 스릴러가 됐다고, 그 장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게 적확하다. 어쨌든 스릴러가 됐으니 무엇이 먼저인지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분노'는 스릴러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으나 끝내 그렇게 돼버린 상황을 한탄하는 작품이어서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1년 전 발생한 살인사건과 1년 뒤 이와 무관하게 각기 다른 세 지역에서 벌어진 어떤 일들이다. 피해자의 피로 벽에 '怒'(노할 노)를 써놓고 도망친 살인자의 행태는 충격적이나 1년 후 펼쳐지는 세 가지 에피소드의 시작은 평범하다. 치바의 아버지는 성매매 업소에서 착취당하던 딸을 찾아 집에 데려왔고 딸은 아버지 회사 직원과 사랑에 빠진다. 도쿄의 동성애자는 마음이 잘 맞는 애인을 만났고, 오키나와 소년은 최근 이사 온 소녀를 짝사랑한다. 그 사이 경찰은 살인 사건 용의자를 특정해 몽타주를 배포하고 수사망을 좁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사랑은 모두 실패했다. 이 사랑들이 온전히 결실 맺지 못한 이유에 '분노'가 던지는 질문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믿음이라는 단어는 간혹 너무 쉽게 쓰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이 말의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분노'는 믿음을 파고든다. 서로를 믿어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말이 아니다. 신뢰와 불신이 사람들 마음 속에 축적된 무기력과 분노와 마주할 때 우리가 맺은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알지만 극 중 인물들은 모르는 정보가 하나 제공된다. '살인범은 도쿄에서 성형수술을 받고 잠적했다.' 그러고보니 치바의 딸이 사랑하는 남자는 어디서 왔는지 정체가 불분명한 사내다. 도쿄의 애인도 자신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꺼린다. 오키나와의 청춘은 무인도에서 보헤미안 배낭여행자를 알게 된다. 이제 관객은 범인 찾기에 나선다. 몽타주는 모두를 닮았다. 어떻게 보면 딸의 남자친구, 또 다르게 보면 도쿄의 애인이며, 보헤미안의 얼굴도 있다.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라면 관객의 의심과 극 중 인물의 의심의 시차는 크지 않다. 다시 말해, 관객이 범인을 찾기 시작하는 시점과 등장 인물들이 외지인을 살인마로 의심하는 시간대가 거의 비슷해 관객과 인물은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가 돼 범인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분노'의 인물들은 살인 사건에 관심이 없다. 그렇게 1년 전 사건과 완전히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극 후반부까지 이어진다. 대신 이 에피소드들에는 다른 의심과 믿음이 자리한다.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함과 동시에 이들의 불신과 신뢰를 들여다 봐야 한다.


 치바의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키워 매춘까지 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분노한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식을 벗어나게 할 수 없는 무력감도 갖고 있다. 그런 딸이 회사 직원과 연애하고 결혼까지 한다니 의혹이 새어나온다. 아버지의 의심은 남자를 향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 대상은 딸이다. '몸을 팔았던 딸이 괜찮을 남자를 만날 수 있을리 없다'는 것. 거기서 딸이 골랐거나 딸을 선택한 남자는 제대로된 남자일리 없다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이 의심은 부녀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게 한다.


 도쿄의 동성애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겉으로는 당당한 인물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어머니에게, 친구들에게도 은근히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그런 그가 최근에 만난 애인이 어떤 여자와 있는 걸 본다. 두 사람은 즐거워보였다. 그는 집에서 애인을 떠보는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추궁하자 이번엔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동성애자는 다소 예민하게 반응한다. "네가 뭔가 근본적인 배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근본적인 배신'이라는 의심때문에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다.


 오키나와 소년의 사례는 앞의 두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 소년은 소녀가 미군에게 성폭행당하는 걸 보고도 돕지 못했다. 그는 무기력했던 자신에게 격노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건 소년이다. 소녀 또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울부짖는다. 소년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소녀의 부탁을 잊고 두 사람이 함께 아는 보헤미안 청년에게 털어놓는다. 청년은 소년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소년은 그를 믿는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소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이들은 모든 의심의 끝에 이르러 관객의 '살인자 찾기'에 동참한다. 치바의 딸은 아버지의 의심에 동요돼 남편이 TV에서 보도 중인 살인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를 신고한다. 도쿄의 동성애자에게서 자라난 의심 또한 애인이 살인범일 수 있다는 불신을 키워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오키나와의 소년이 믿었던 보헤미안 청년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소녀가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자신도 목격했다고 고백하고, 미군들이 '경찰이다'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도망가버린 게 참 한심한 일이라고 말해 소년의 분노를 산다. 결국 소년은 청년을 칼로 찌른다.


 아름다울 수 있었던 사랑과 우정은 그렇게 깨졌다. 이 비극은 충분히 아프지만, 거기서 그치는 건 영화가 원하는 게 아니다. 세 이야기의 결론들은 마음 속 불신과 신뢰가 무기력과 분노를 만나 변질된 결과다. 영화 제목이 '믿음'이 아닌 '분노'인 이유는 그 감정의 정체가 이 사건들의 본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화'를 쌓아 관계를 해체하는 건 개인의 특정 성격이 아니라 사회의 왜곡된 시선과 편견, 그것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사회 분위기가 개인의 마음 속에 스며들었기 대문이라는 게 이상일 감독이 끝내 내놓은 결론이다.


 치바의 아버지와 도쿄의 동성애자, 오키나와의 소년을 옥죈 건 사회가 품은, '일반적'이라고 불리는 시선이었다. 몸을 팔았던 여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아버지의 마음 속에도 깊이 자리했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왜곡된 평가는 도쿄 남자의 내면에 들어앉아 기어코 애인을 배신자로 몰아갔다. 그는 함께 사회의 시선을 견디는 줄 알았던 동지였던 애인이 여자를 만난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미군기지와 관련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수십년 동안 자리한 무기력과 분노는 어느새 소년의 마음 속에도 자리했고, 사회가 주입하다시피한 나약한 마음은 몇 마디 입발린 말에 너무나 쉽게 휘청거렸다. 

 그러니까 '분노'는 사회가 만들어낸 불안한 마음들이 들끓어오르다가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살인사건과 만나 폭발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멜로가 될 수 있던 관계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스릴러적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해서 이상일 감독이 스릴러가 되고만 세계에서 희망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분노'는 믿을 수만 있다면, 세계를 낙관할 수는 없어도 희망은 있을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문제는 믿을 수 있느냐다. 그들이 옆에 있는 사람을 믿었을 때 이들의 관계는 위태로워 보여도 아름다웠다. '분노'가 던진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다면, 믿을 수 있다. 동어반복이어도 이 길 밖에 없다. 


(글) 손정빈

작가의 이전글 이것은 종교영화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