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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런 : 너겟의 탄생] 불가피한 인지부조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by 태인






어렸을 적 분명히 채소보다는 고기를 선호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끼리 고기를 먹으러 가면 상추에 싸 먹는 법 없이 밥과 고기를 함께 열심히 먹었다. 고기는 내게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무언가였다. 그러다 성인이 된 후 동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배우게 됐다. 그제야 내가 동물을 존중받아 마땅한 소중한 생명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불어 동물들도 인간처럼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 이후 우연히 자신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줄 알고 눈물을 흘리는 소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후 도저히 예전처럼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기 섭취를 최대한 줄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기꺼이 즐겨오던 육류를 어느 날 갑자기 모두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더구나 채식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고, 채식 전문 식당이나 채식 옵션을 제공하는 음식점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다니며 완전 채식을 하는 일은 꿈꿀 수도 없다. 부끄럽지만 매일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일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래서 결론 내리길, 가능한 한 해산물을 먹되 육고기는 되도록 닭만 먹기로 했다. 닭을 선택 가능한 옵션으로 정하자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고기를 최대한 먹지 않겠다는 나를 유난스레 여기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혹은 변명하듯 그래도 닭은 먹는다고 항변도 가능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은은한 죄책감은 애써 무시한 채로.



• 닭장을 나온 암탉, 딸을 구하러 다시 들어가다


치킨 파이가 될 뻔했지만 다른 닭들을 이끌고 악랄한 농장주 트위디의 농장에서 탈출에 성공했던 암탉 진저는 남편인 수탉 록키, 그리고 다른 닭들과 함께 외딴섬에 정착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진저의 알이 부화하고, 사랑스러운 병아리 딸 몰리가 태어난다. 진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인지 청소년이 된 몰리는 섬을 벗어나 자유롭게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만, 섬 바깥에서 닭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너무나 잘 아는 진저는 어떻게든 그런 딸의 호기심을 꺾으려 한다. 그러나 몰리는 결국 부모님과 다른 닭들이 모두 잠든 사이, 바구니 안에서 닭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의문의 트럭을 쫓아가고, 도중에 만난 친구 프리즐과 마침내 트럭에 올라 펀랜드 양계장에 도착한다.


몰리와 프리즐은 처음엔 컨테이너 위의 닭들에게 한 마리씩 수상한 목걸이를 채우는 것을 목격하고 겁에 질려 도망치려 하지만, 이내 온갖 먹을거리와 즐길거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머지 닭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둘은 다른 닭들이 모두 무언가에 홀려 있는 듯한 모습임을 깨닫고 이상하게 여긴다. 사실 그곳은 진저가 물리쳤던 농장주 트위디가 세운 치킨 너겟 공장으로, 닭들이 도축되는 순간까지 가짜 행복을 느끼도록 특수한 목걸이를 채워 감정을 조절해 더 부드러운 고기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몰리와 프리즐은 도중에 도망치려 하는 바람에 목걸이를 하지 않아 세뇌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몰리가 펀랜드 양계장으로 향하는 트럭을 탄 걸 깨달은 진저와 다른 닭들은 몰리를 구하기 위해 결국 안전한 섬을 벗어난다.



• 비건을 비난하는 진짜 이유


영화 ‘치킨 런 : 너겟의 탄생’은 ‘치킨 런’의 후속작 격이지만 그 사이에 23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첫 번째 편이 너무 오래전 나왔던 영화인지라 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해당 이야기에서 진저와 닭들은 빌런 트위디를 무찌르고 농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다. 영화나 책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주인공인 진저나 닭들에 이입하며 영화를 보게 됐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식을 구하려는 부모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다 어느 순간 원인 모를 불편함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나는 인간이고, 주인공은 닭이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에서 소가 눈물 흘리는 사진을 본 이후, 또 한 가지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됐다. 다름 아닌 가축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의 평균 수명이다. 대표적인 동물들만 언급하자면 소는 20년, 돼지는 12년, 닭은 8년가량을 살 수 있다. 우리가 반려 동물로 주로 키우는 개나 고양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명이다. 그러나 소, 돼지, 닭은 각각 네 살, 6개월, 한두 살이 될 때쯤 도축된다. 타고난 수명에 비해 그들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극히 짧은 것이다. 이처럼 어떤 동물들은 음식 취급을 받으며 생을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는 데 반해 인간의 눈에 귀여운 동물들은 식용 금지까지 되었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내가 비건 식당을 가자고 제안하자 지인이 기분 나쁜 듯 반응했던 일, 동물을 사랑해서 육식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고 하자마자 소개팅 남이 연락을 끊었던 일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일화다. 그리고 유튜브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고기 먹방 영상을 찾아볼 수 있고, 삼시세끼 고기반찬이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흔하다. 이런 상황에서 동물권을 위해서든 기후 위기 때문이든 아무리 좋은 이유를 갖다 붙여도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은 은근한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비건에 대해 유난히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비건인 사람들은 홀로 깨어 있는 척하고 가르치려 들어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그러나 냉정히 따졌을 때 앞서 언급한 동물권이나 기후 위기 등을 이유로 고기 섭취를 줄이려는 쪽과 마치 집착하듯 육식을 찬양하는 부류 중 어느 쪽이 더 깨어 있는 편에 가까울까. 물론 일차원적으로 생각했을 때 누군가에게 식습관에 대해 지적받는 상황은 유쾌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강하고 미래지향적인 이유로 고기 섭취를 줄이자고 제안하는 일이 온갖 혐오와 조롱을 받아 마땅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과할 정도로 비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선생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동물과 자연 모두 존중의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서 누려 마땅한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 권리를 부정당하는 것 같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모두가 고기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일주일 내내 고기를 입에 안 댔다가도 그다음 주에는 이틀 연속 고기가 든 메뉴를 먹기도 한다. 다만 일주일에 하루 이틀쯤은 고기 없이 지나가 보고, 하다 못해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만큼은 삼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육식 동물조차도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고기를 끊임없이 먹기 위해 축산업까지 발전시킨 인간은, 특히나 온갖 먹방을 통해 고기 섭취를 부추기고 채식을 하는 이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대한민국은 분명 고기를 과잉 섭취하고 있다. 아직은 너무 큰 바람처럼 느껴지지만 언젠간 한국에서 비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육식을 종교처럼 찬양하는 문화만큼은 사라지기를 바라본다.






사진 출처 : https://m.imdb.com/title/tt8337264/?ref_=ext_shr_l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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