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허용이 아닌,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
이혼할까.
더 이상 이런 역할극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어느 날,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나’를 찾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손쉽게 떠올린 방법은 이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최선일까?
‘정신적 독립’이라는 것이 꼭 이혼을 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나는 정말로 남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 관계의 방식을 끝내고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사랑하고 싶은 걸까.
이 질문들 앞에서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아직 남편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내가 바랬던 '나의 의존처'로서
제대로 역할하지 않아 성이 잔뜩 났을 뿐,
나는 '그'라는 사람을 아직 좋아하고 함께 하고 싶었다.
남편과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깊게 나눈 적이 없었다.
일부러 서로의 마음을 애써 피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몰랐듯,
남편 역시 자기 내면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죄책감과 책임의식으로 길러져
어머니에게 아내의 경계를 허락하는 일이
‘효도’이자 ‘자식의 도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들을
빈틈없이 모두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행복해지려면
이해와 허용, 그 차이를 알고
우리의 경계를 각각 지켜내는 것이 필요한 것을,
그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에게는 수많은 대화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나 역시 과거에, 경계를 허락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사랑과 도리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 기억이 있기에 남편을 마냥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로만 옆에 서 있을 때
내가 느낀 건 외로움과 공허함이었다.
연애 시절부터 이미 그 공허함은 있었고,
결혼 생활 속에서 더 선명히 드러났다.
나는 그 공허함의 원인을 인식하는 데만도 오래 걸렸고,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아내와 며느리의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남편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했다.
그 역시 말했다.
이제까지 나도 너무 힘들었다고.
그렇게 우리는 '의존'으로 묶인 결혼과 가족이
얼마나 서로를 불행하게 해 왔었는지를
차근차근 이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진심을 편견 없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관계에서 신기한 점은,
서로의 진심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순간
비로소 상대가 ‘가장 사랑스러운 안전기지’가 된다는 것이다.
억지로 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가 먼저 알고
그것을 부드럽게 표현할 때 열린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의존이 아닌 사랑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열리는 것이었다.
무조건 허용이 아닌, 깊은 이해로.
성난 표현이 아닌, 조용한 자기 고백으로.
상대에게 나의 무엇이 되어달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그 무엇이 되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을 때
비로소 피어나는 이상한 것이었다.
내가 나 스스로 우뚝 설 때,
누군가의 응답에 부응하지 않아도 되고,
받지 못해도 서운하지 않을 만큼
내 존재가 단단해질 때.
조용히 빛처럼 다가와 마음을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젊은 날의 ‘자기 안에 푹 빠지는’ 사랑에서 벗어나
이제야 '각자의 자리에 서서’ 서로를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이었다.
사랑은 능동적 행위이다.
단순히 강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주고 돌보고 책임지고 존중하고 알기를 포함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falling in love)’이 아니라,
‘사랑 안에 서는 것(standing in love)’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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