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는 거랑 디자인 시스템이 무슨 상관이냐고요?
집에서 밥을 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귀찮고, 번잡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이 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한두번이 아니라 꽤 본격적으로 집에서 요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일이라는 걸 자신할 수 있다.
대부분 집에서 조금이라도 해먹어야겠다! 라고 결심한 사람은 쌀, 김치, 참치나 햄같은 통조림류 및 냉동식품 정도를 기본으로 두고 간장(솔직히 진간장 국간장 구분할 정도면 이미 이 단계를 뛰어넘었을 것), 소금, 후추(그라인더말고 오X기 순후추가 근본이다), 설탕, 고추장 정도와 5천원짜리 다이소표 후라이팬&냄비&칼&가위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사실 이정도만 해도 내가 무언가를 해먹기에는 큰 무리가 없을 수 있다. 제육볶음을 예로 들면, 돼지고기를 사서, 고추장을 넣고, 여유가 된다면 양파와 파 정도를 넣고, 간을 보니 애매해서 설탕이든 소금이든 뭔가 더 넣어보고, 간장도 넣고, 그러고 엄마에게 전화해 다진마늘을 넣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스토리다. 고기와 양파, 파만 있다면 어느정도 해먹을 만한 게 나온다는 뜻.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요리를 한다면? 3일에 한번씩 내 양심과 건강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강제로 집밥을 지어 먹는 징벌적 밥상말고, 내가 하루에 최소 1번은 3첩 이상의 식단을 꾸리겠다 또는 하루의 식단을 미리 계획해서 요리하겠다 라든가, 일주일 치 식단을 계획하고 주말에 장을 보겠다 등 말이다.
그러면 이제 이야기가 달라진다. 음식의 경제는 매우 신기해서, 한두번 먹을 분량의 깐양파가 생양파 중간사이즈 한 망보다 조금 싸다. 즉, 식재료는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곳이라 빠르고 많이 소비할 수록 결국 절대적인 비용이 줄어든다. 깐 대파 한팩을 사면 한두번 정도에 다 먹고 없어지지만, 그 돈으로 대파 한 단 사서 다 다듬고 물기를 닦아 냉장/냉동보관하면 한달 이상 최소 5~6번은 요리에 활용할 수 있는 양이다. 만약 더 빨리 먹는다? 그러면 한 단 이상 단위를 한번에 사서 보관하면 된다. 즉, 한끼 분량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끼니를, 한번에 준비하게 된다면 내 시간과 돈이 절약된다는 뜻이다.
조미료도 또 다르다. 가끔씩 해먹는 게 아니라 매일 해먹을 거라면 어느정도 나만의 레시피가 생겼을 것이다. 제육볶음도 이제 당근, 파, 양파 한줌씩 + 돼지고기는 후추에 밑간 + 고춧가루, 간장, 다진마늘, 물엿, 맛술 같이 자신만의 시스템이 생겼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진간장과 국간장을 어느정도 구분하고, 고춧가루, 물엿, 맛술, 치킨스톡, 굴소스, 미원, 맛소금 같이 매일의 식단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기 용이한 형태의 조미료들을 구비해둘 것이다. 처음에는 제육볶음의 맛이 그냥 고추장 바른 삼겹살 같았지만, 이제는 미리 구비해둔 조미료와 나만의 레시피로 더 빠르게,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이제 집을 떠나 본격적으로 음식점을 차려보자. 갑작스러울 순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생각해보자. 매일 집에서 밥하다가 우연히 요리가 좋아서 이제 밥집을 차린다는 세계관이다.
그러면 이제 혼자 가끔 한끼 만들 때와는 더더욱 차원이 달라진다. 하루에도 100명 200명 분의 제육볶음을 신나게 볶아야 하고, 그걸 위해서 새벽엔 양파 망을 수십개를 까서 프렙(prep;preparation: 식재료를 미리 다 다듬어두고 바로 요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해둬야 한다. 조미료로 큰 통으로 왕창 놓고 써야한다. 개인 음식점이라면 일일히 내가 다 준비해야 하지만, 그래도 레시피는 내 마음대로 하면 된다. 레시피의 맛을 결정하는 건 내가 얼마나 레시피를 열심히 연구했는지와 얼마나 철저하게 레시피를 지키느냐다. 그만큼 어렵다. 일단 맛있게 하는 것부터가 관건
프랜차이즈는 조금 경우가 다를 것이다. 특히 유명 프랜차이즈라면 이미 효율이 좋은 레시피를 중앙에서 각 지점에 공급해주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 지점에 필요한 식자재를 미리 다 준비된 상태로 공급해줄 것이다. 레시피가 바뀌거나 신메뉴가 추가되도 지점에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변경된 레시피는 바로 전달될거고, 신메뉴 식재료로 매일 오던 탑차에 추가로 담겨 온다. 우리가 신경쓸 건, 이 레시피의 원칙들을 잘 지키면 되고 이 식재료의 관리만 철저하면 된다. 그만큼 프랜차이즈에선 더 빠르고,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매장을 돌릴 수 있다. 그만큼 다른 부분에 투자할 시간 여유도 생긴다. 10분 걸리던 제육볶음을 중앙에서 공급하는 식재료와 레시피로 3분 안에 서비스할 수 있다. 남은 7분은 내가 쉬어도 되고, 프로모션을 기획해도 되고, 앞에 나가서 점심 장사 홍보를 해도 된다.
왜 이렇게 밥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냐면, 물론 취미로 집에서 꽤 자주 요리를 하는 편이라 더더욱 공감해서 그랬겠지만, 결국 디자인 시스템도 이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프로덕트의 규모를 딱 혼자 가끔 밥 해먹는 정도인지, 매일 식단을 짜서 일주일치 장을 봐야 하는 규모인지, 아니면 밥집을 차릴 정도인지, 그 이상 프랜차이즈화의 규모인건지를 생각해보자.
나 혼자 만들어서 가끔씩 유지보수하고 피쳐를 업데이트하는 정도의 앱/웹이라면, 사실 굳이 조미료를 갖출 필요가 없다. 간장, 소금, 설탕만 두고 스팸이나 가끔 구워서 햇반에 돌리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가끔씩 한끼를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이정도인 것이다. 디자인 시스템이라 할 것도 필요 없고, 스타일 가이드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필요할 때 버튼을 직접 수정하고, 색상을 수정하고, 레이아웃을 고치면 된다. 어차피 나만 보면 되는 거고, 가끔만 수정하면 된다.
나 혼자 만들긴 하지만 최소 일주일에 한번 업데이트를 한다거나, 기획자 또는 개발자, 또는 디자이너가 한두 사람 더 있는 경우라면, 이제 조금 규모가 더 커야한다. 최소한 일주일 단위로 유지보수하게 된다면 자주 개선되는 컴포넌트는 미리 템플릿을 만들어 두는 게 편하다. 뭐가 들어간다는 최소한의 레시피를 짜두거나 양파와 당근을 일주일 치를 사서 미리 손질해두는 작업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준비할 땐 힘들지만 해두면 일주일을 편하게 쓸 수 있다. 체계라기보다는, 서로 일할 때 지킬 규칙 정도가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스타일 가이드. 당근 모양이 일관적일 필요는 없고 그냥 채썬 당근이 필요하다 이 말이다. 자주 쓰는 조미료들은 메인 식재료는 아니지만, 구비해두는 것이 새로운 식단을 짤 때 편리하다. 굴소스와 치킨스톡처럼 자주 쓰는 컬러나 서체 사이즈 등의 엘리먼트는 찬장에 구비해두듯 스타일 가이드에 작성해두는 것이다.
이제 밥집을 차려야 하는 규모다. 매일매일 업데이트나 새로운 피쳐에 대해 빠르게 테스트하고 디자인해야한다. 나 외에도 같이 일하는 팀이 생겼다. 정량의 레시피가 필요하다. 단순히 채썰어둔 채소들을 준비해두는 것을 떠나서, 메뉴판이 생겼기에 그에 맞게 당근을 채썰거나, 어슷썰거나, 다져두어야 한다. 이때 채썬 것의 두께와 길이는 어때야 하는지, 왜 이정도 채썰어야 하는지 주방 직원 모두가 얼라인되어야 한다. 어슷썬 건 어느 어느 메뉴에 넣어야 하고, 다진 당근은 어느 메뉴에 넣어야 하는지도 서로 공유되거나 문서화되어야 한다. 즉, 체계라고 불리는 것이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나 혼자 식재료를 사고 다듬고 요리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주방 직원 사이에서도 누구는 식재료를 창고에서 가져오는 사람이 있고, 이걸 프렙하는 사람, 이걸 실제 조리에 쓰는 사람 등 어느정도 역할 분담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당근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가공되고 어떻게 조리되어야 하는지도 체계에 작성되어야 한다. 조금 더 운영 측면이나 요리사가 아닌 사람까지도 이 당근에 대한 관리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스타일 가이드가 필요하다. 디자인 시스템의 필요성이 조금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피쳐를 만들기 위해 빠르게 테스트해야 할 때, 버튼의 구조와 상태 변화, 사용 예시 등을 미리 규정하고 체계화해야 기획자와 디자이너, 개발자가 빠르게 얼라인된 상태에서 효율적으로 디자인을 만들고 테스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버튼에 대한 체계가 없다면, 기획자는 서비스와 어울리지 않는 버튼 레이블을 기획안에 넣을 수도 있고, 디자이너는 버튼의 라운딩, 패딩, 색상, 서체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없고, 개발자는 이미 프로덕트에 있는 버튼을 그대로 다시 반복 사용하는 게 아니라 새로 그려야 하는 부담이 생기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과 비용은 배로 들어간다.
그 이상의 프랜차이즈 밥집이 된다면 이제 프로덕트의 규모가 매우 크거나 하나 이상의 프로덕트에 많은 피쳐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셈이다. 각 지점에 균일한 품질과 크기의 당근을 보내줘야 각 지점에서 만드는 요리의 품질도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때는 개인 음식점을 운영할 때와는 또 다르게 생산공장, 물류, 직원 교육 등의 요리 외적인 운영 관점의 중요성도 상승하게 된다. 즉, 식자재를 공급하는 것부터 손님의 식탁에 오르기 까지 전 과정에 있는 것들이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컴포넌트에 대한 디자인 가이드뿐만 아니라 컴포넌트가 어떻게 모듈화되어서 실제 프로덕트에 반복 사용되는지, 컴포넌트를 활용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어떻게 새로 배리에이션을 하는지 그 모든 규칙과 원칙이 체계적으로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당근(컴포넌트)들은 본사에서 만든 당근 가공 원칙(디자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일관되게 생산되며, 본사는 이걸 각 지점(프로덕트, 또는 단위 팀)로 배송한다. 각 지점에서는 본사에서 규정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피쳐(음식)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메뉴(피쳐)를 개발한다 해도 어렵지 않다. 본사에선 이미 메뉴를 연구하기 적합한 형태로 식자재를 가공한 상태(디자인 시스템)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식재료(컴포넌트)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어떤 메뉴를 만들지만 정하면 채썬 당근과 채썬 양파, 굴소스, 면사리를 조합해 볶음면 사이드 메뉴를 개발해 내부 테스트를 해볼 수 있다. 맛이 없다면 또 다른 메뉴를 바로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인 시스템은 즉, 프로덕트의 품질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동시에 프로덕트의 개선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설계-디자인-개발의 총체계라는 것이다. 단순히 당근을 채썰어주세요 같은 스타일 가이드(레시피)의 한 줄 문구같은 것이 아니라, 당근의 양, 당근 채썰 때의 사이즈 및 굵기, 제육볶음에서 당근을 넣는 양, 타이밍과 조리 시간(tmi : 당근은 단단해서 초반에 넣고 오래 조리해야 물렁해진답니다), 야끼소바에서 당근을 넣는 타이밍과 조리 시간 등을 총정리해둔, 구성원들의 당근 사용 이해도를 얼라인(디자인 현업 사전 : 알고 있는 지식 정도를 비슷하게 맞추다 정도의 뜻)하는, 일종의 컴포넌트 대백과사전 같은 것이다. 기획자는 새로운 피쳐를 구상할 때 디자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새로운 피쳐를 구성할 것이고, 디자이너는 반복사용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컴포넌트를 가져와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피쳐를 만들어볼 수 있다. 개발자는 컴포넌트를 미리 모듈화하고, 그 모듈화한 컴포넌트를 호출해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피쳐를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디자인 시스템이 무조건 프로덕트를 디자인하는 모든 UI/UX/웹/프로덕트 디자이너들에게 압도적인 효율 상승과 업무의 만족도를 쑥쑥 키워주는 것은 아니다. 혼자 가끔 집에서 생존형 식사를 하는 독립가구에게 치킨스톡이나 화유, 발사믹 오일, 애플시나몬 시럽, 엄청난 양의 채썬 당근 같은 건 있어봐야 빨리 먹을 수도 없고, 이것들을 억지로 처리하기 위해 오히려 돈을 더 써야하는 비효율을 가져올 수 있다. 혼자 가끔씩 유지보수가 필요한 프로덕트를 운영하는데, 이걸 위해서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오히려 실제 프로덕트에 쏟는 리소스 그 이상의 낭비를 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결국 디자인 시스템은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곳이라면 결국엔 도입을 고려할 것이다. 도입 전후의 효율성은 당연히 차이가 클 수 밖에 없다. 다만 객관적으로 우리 서비스와 프로덕트를 바라볼 필요성은 있다. 그 도입이 현재 우리 프로덕트 규모에 맞는지, 앞으로 어떤 속도(속도는 벡터값이라 위치와 속도를 모두 포함하지요)로 프로덕트의 규모를 키울 건지에 따라 그 도입 자체의 효율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컴포넌트를 요리하는 디자이너라면 언젠간 프랜차이즈 밥집에서 레시피를 놓고 체계적인 당근 썰기를 하겠지만서도, 지금 내가 아직 열심히 칼질을 해봐야 하는 1인 가구일지, 어느정도 당근을 채썰어보는 일주일치 장바구니 살림꾼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시스템을 도입할 지를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