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존재의 위엄이 뭔가를 상징하는 데서 비롯됨을 개인이 깨닫는다면 개인주의도 완전히 좋다. 세계와 환경의 나머지가 갖고 있지 못한 이상과 이미지의 체계를 개인이 상징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는 뭔가의 대리자이며 신이다.
―조셉 캠벨, 『영웅의 여정』
3월 첫날이다. 연말엔 <매트릭스>가 재개봉을 하여 나를 기쁘게 하더니, 또 새봄과 함께 <위플래쉬> 재개봉 소식이 날아왔다. 이 둘은 나의 쌍벽 영화로, 가장 많이 본 영화(매트릭스) 및 극장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위플래쉬)를 기록하고 있다. 이의 재개봉 소식에 영감을 얻어 브런치북 <책·영화·음악>을 만들었다.
10년 전 <위플래쉬>를 영화관에서 처음 봤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보다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미친 드럼 연주)에선 온몸의 세포가 전율하는 느낌과 함께,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 3일 연속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봤었다. ‘극장에서 세 번 본 유일한 영화’의 기록이 아직 깨지지 않았는데, 이번 재개봉으로 여기에 1회(?)를 추가하게 되었다. 향후 얼마간 이 기록을 갈아치울 작품은 없을 듯하다. 내가 알기로 이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영화는 없다. <위플래쉬>는 에너지 자체이다.
에너지는 선악을 초월한다. 상식의 관점에서 ‘악’(플레처)으로 보이는 것은 자기완성의 촉매이자 도우미이며,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이다. 인간에겐 영혼의 적수라 할 ‘플레처’가 있는데, 그 힘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고 그것을 통해 완성될 수도 있다. 강한 에너지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악마의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자신의 그림자 자아인 악마를 이용해 거듭난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악’은 (드럼을 관두고) 집에 가자고 말하는 아버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감싸주는 것 같지만 앤드류가 아빠 품에 안겨 집으로 갔다면 천재는 영원히 죽는 것이다.
앤드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그러나 부모의 생존 카르마는 그 실현을 저지한다. 생존 카르마란 죽음에 잠식된 의식이다. 이는 본성이 깨어나지 못하게 막는 매트릭스(자궁)로 기능한다. 그것은 ‘사랑’과 ‘보호’의 탈을 쓰고 존재를 자궁 속에 가둔다. 고로 진짜 나쁜 것은 본성을 깨우는 플레처가 아니라 본성을 (무의식적으로) 죽이는 부모다. 아버지 뜻에 따랐다면 앤드류는 자기 존재를 펼치지 못한 채 뒷골목에서 알바나 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는 부모의 뜻이 아닌 자신(신)의 뜻을 따른다.
의식에 프로그램된 생존 카르마의 실체를 알고 그것을 깨면 죽음의 룰에 지배되지 않게 된다. <위플래쉬>는 그 ‘알 깨기’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선량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강력하고 무자비할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본래면목이 깨어난다. 자기는 홀로 태어난다. 앤드류가 비사교적이며 친지, 동료, 여친 등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그에겐 어머니도 없다. 엄마가 집을 나가 원래부터 없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또한 상징적이다. 마더(자궁/matrix) 콤플렉스를 넘어서는 것이 자기 탄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봄학기 <삶과 철학>에선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적용해 수업을 한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앤드류처럼 바닥의 바닥을 찍고도 다시 일어나 자기의 꽃을 피우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 꽃이 피어나는 데는 ‘플레처’라는 에고(ego)가 필요하다. 상징적으로 플레처를 앤드류의 에고라 놓고 보면 이 영화의 중층적 의미가 드러난다. 그 ‘악마적’ 에고가 존재를 바닥까지 추락시키는데 그것은 존재의 개화를 위해 필요한 단계였다. 큰 성취를 위한 악역인 셈. 만사는 섭리 안에서 일어나며 기존의 것이 죽어야 새 존재가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