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많이 읽었지만 지금은 읽지 않는 깨달음 관련 책들이 여전히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정체감을 느낀다. 책들의 사양이나 외양이 좋아졌을 뿐, 시간이 지나도 의식 차원에선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관련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비슷한 유의 책들을 찍어낸다. 그 모든 게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 출판사가 내놓은 상품과 그 상품을 사는 자들의 일시적 쾌락, 그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식이 깬 자가 자기 수준에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듣는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달라지지 않으니 계속해서 찾고 사고 탐닉하는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중독’이다. 내면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말하는 외부의 것’을 본다. 그 실재처럼 보이는 헛것에 빠져 ‘영적 쇼핑’을 한다. 에너지 수준이 높은 것을 ‘맛’보고 ‘구경’하는 행위를 통해 도파민을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얻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정의한 깨달음은 자기가 되는 것, 나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외적 대상을 숭배하는 종교나 깨달음에 대한 장광설이 아니다. 실속 있는 한마디를 자기 삶에 실현하고 육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속 있는 한마디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가령 어떤 영성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건강은 모든 힘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그런 상태에 빠져 있다면 건강한 방향으로 삶을 개선해 나가면 된다. 그런데 다른 책을 펼치니 또 이런 문장이 있다. “존재는 있는 그대로 완전하기에 아무것도 바꿀 것이 없다.” 그럼 건강하지 않은 상태는 뭔가? 그것은 존재가 아닌가? 아니다.
존재의 실상, 실재는 생명이고 건강이지만 인간의 의식이 비실재에 팔려 있으면 비건강이 나타난다. 비건강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치유를 통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실재 아닌 것을 사라지지 않게 ‘붙잡고’ 있을 수가 있다. 비실재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그렇게 된다. 이 ‘팔려 있는’ 상태가 중독이고 우상 숭배이고 외부 의존이다. 그리고 이 정신 ‘나간’ 상태를 ‘들어오게’ 하는 것이 자각이고 건강이고 나 되는 길이다.
심신의 건강이 곧 실재의 구현이고 깨달음의 실현이며 신성의 육화이다. 나로 건강하게 사는 것, 그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책을 치워야 건강해진다. 중독을 끊어야 실재가 드러난다. 자기 바깥에는 신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