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렉산드로 푸쉬킨 <스페이드 여왕> 길혜연 배우의 목소리로 듣고
밀리의 서재에서 길해연 배우의 낭독으로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을 들었다.
탁하고 건조한 음색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잔상을 남겼다.
문장이 아니라 숨소리가 먼저 들리는 듯했고,
그 호흡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19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두운 카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전형적인 악당도, 영웅도 없었다. 다만 우리와 지독히도 닮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주인공 게르만은 원래 절제와 근면을 신봉하던 인간이었다.
"절약, 절제, 근면. 이것이 나의 믿을 만한 패다."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압박에 쫓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시야는 필연적으로 좁아진다.
그는 세상을 넓게 보지 못했고, 단 하나의 해답 — 백작부인의 비밀 — 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 집착의 과정에서 그는 사람을 '관계'로 바라보지 않았다.
리자의 마음도, 노파의 삶도 그의 눈에는 목적지로 가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었을 뿐이다.
나폴레옹이나 메피스토가 소환된 것은, 목적을 위해 타인을 철저히 장기말로 다루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그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리자는 그를 향해 절규한다.
“당신은 괴물 같아요.”
그 말은 저주라기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게르만은 그 순간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비법'이라는 환영에 눈이 멀어 타인의 진심을 짓밟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이미 괴물로 변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파의 죽음 앞에서도 게르만이 슬퍼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세계는 이미 타인의 고통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오직 카드의 숫자만이 지배하는 좁은 방이었기 때문이다.
3, 7, 에이스. 이 세 장의 카드는 단순한 도박의 공식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정직하게 쌓아 올리는 삶의 과정을 생략하고,
단번에 인생을 뒤집을 수 있다는 '치트키'에 대한 믿음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세계에도 그런 숫자들이 떠다닌다.
'자동화 수익', '투자 비법', '성공 알고리즘'.
우리는 때때로 내가 오늘 걸어온 정직한 길보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완성된 해답을 더 신뢰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시야는 닫힌다.
게르만이 죽은 백작부인의 눈동자만을 광적으로 바라보듯,
우리 역시 하나의 가능성에만 모든 것을 건다. 그 매달림이 파국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마지막 판에서 게르만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신이 쥔 카드가 에이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드가 뒤집혔을 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스페이드 여왕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불운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선택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근면이라는 자신의 패를 버리고 타인의 비법을 선택한 순간,
그는 실제 하는 결과가 아니라 허구의 환영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게르만은 운명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 채, 보고 싶지 않은 모든 진실을 외면하며 끝까지 나아갔을 뿐이다.
도대체 3, 7, 에이스란 무엇이길래 그는 끝까지 놓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승리의 숫자가 아니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확증 편향'의 결정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에이스를 믿었다.
하지만 카드가 뒤집히는 순간 드러난 것은 잔혹한 진실이었다.
바뀐 것은 운명이 아니라, 에이스라고 믿고 싶었던 그의 일그러진 확신이었다.
어쩌면 우리 역시,
각자의 '스페이드 여왕'을 쥔 채 그것이 승리의 에이스라고 확신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