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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태웅 Mar 23. 2017

빚은 없다

해외 유명 미니멀리즘 에세이 번역 연재 #2


더욱 풍성한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기 위해, 미니멀리즘에 대한 해외 인기 에세이들을 번역해 싣고 있습니다.

물론 사이사이에 다시 필자 본인의 생각과 이야기도 쓰고 있고요.

※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번역상 작은 오류들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해외 유명 미니멀리즘 에세이 번역 연재 #2

제목: 빚은 없다.

원제: Dept free

출처: http://www.theminimalists.com/debt/



 

    자주 찾는 카페. 그 카페 고유의 향과 소리 안에서 줄을 서는 중이었다. 빠른 템포의 어쿠스틱 기타와 탬버린 소리로 가득했고, 앤디 데이비스의 톤을 따라 하며 나는 혼자 “It’s gooooo-ood life”라고 멜로디를 읊조렸다. 물론 이건 음치처럼 여러 음을 놓친 것이었지만 나는 창문 밖의, 그 텅 비어있는 분위기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꿋꿋이 불렀다. 봄의 첫 주였긴 했지만, 미줄라Missoula(도시 이름)에는 전혀 봄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바깥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매우 청명한 동시에 보기 좋았다.


    커피 냄새를 맡았다. 단순한 커피 향 하나로도 거의 종교에 가까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카페 주인장, 제로드는 거대하고 빛나는 커피 머신 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마치 숙련된 군인처럼 가까운 정밀한 컨트롤로 커피 기계 레버를 당기고, 돌려 조이면서 그 거대한 기구가 커피콩을 갈고 스팀 소리를 내도록 만들고 있었다. 저걸 보고 있자니 제로드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공학 학위를 갖고 있을 거라 상상해본다.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꼬마 아이가 길거리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만큼이나 인상적인 모습이다. 내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낯선 풍경인 동시에 매료되는 모습인 것이다. 어떻게 안 그렇겠는가?


    카페로 들어온 손님들은 발에 뭍은 눈을 털고 겉옷의 녹아내린 눈 자국들을 닦아내면서, 얼굴에 밝게 화색이 돈다. 그들의 자세 역시 카페의 높은 천장 아래서 자동적으로 변하고 만다. 여기서는 보통 키의 단골손님들도 모두, 적어도 1/2인치는 키가 커 보인다. 그들이 이 카페 줄에 서서, 이 자연광과 커피 향에 빠져들 때 말이다.


    제로드Jerod는 몬타나에서 가장 아메리카노를 잘 만든다. 단언컨대 1등. 커피머신 뒤에서 그는 3면 정장을 입고, 진지하게 묵상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나는 커피에 대해 매우 진지해'라고 말하는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까지 모를 정도로 심각하기만한 놈은 아니라고 말하는듯 하다. 그러나 만약 내가 방금 같은 말을 뱉어낸다면, 내 뒤의 손님들은 아마 내가 대마초를 했다고 생각하면서 십중 팔구 911을 부를 것이다. 그러나 제로드는 커피에 대한 멋진 믿음과 함께 그 작업을 진행해낸다. 프로 중의 프로처럼, 그의 노동을 즐기는 것이다.


    어느새 내 주문 차례. “블랙 아메리카노." 주문대의 검은 머리 소녀는 간직하고플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띄고 있다. 그녀는 무서우리만치 매력적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내게 어떻게 계산할 건지 물을 때 똑똑하게 대처하는 걸 놓치곤 허둥댔다. 아무 것도 못했던 것이다. 아무 말도. 역시 내 입은 쓸모가 없다.


    나는 지갑 속 몇 없는 지폐들 중에서 몇 장을 꺼내 값을 지불했다. 신용카드를 쓸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 적어도 카드가 없기 때문에. 눈 내리는 날씨는 창밖의 모든 것들을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흰 페인트의 젖은 부스러기들처럼 거대한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깎여 떨어지는 것 같은 눈이었다. 신용카드가 아닌, 차갑고 딱딱한 현찰은 내가 요즘 들고 다니는 유일한 돈이다. 현찰은 갖고 다니기 더 힘들고 매번 돈 낼 때마다 머리를 핑핑 돌게 한다. 내가 지불하는 모든 달러들은 1달러만큼의 자유를 지불하는 것과 것처럼 불편하다. 나는 팁을 넣는 통에 1달러를 낸다. “팁은 섹시하다”라고 적혀 있었던 그 통 말이다. 그리곤 그 검은 머리 점원에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건 아니었다. (물론, 저렇게 미모의 여자들에게는 늘 미소 짓곤했지만... 흠, 생각해보니 팁을 늘 내온 것도 아니긴 했네.)


    나는 몇 달 내에 32살이 되고, 이건 성인의 삶 중 처음으로 빚에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라 하겠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게 좀 이상하기도 하다. 보다시피, 체이스Chase 은행이 오하이오의 돈 없는 꼬마인 내게 5천 달러 한도의 첫 마스터 카드를 허락한 후 돈 쓰는 것에 침을 흘리게 만든 18살부터, 거의 14년이 지난 저번 달까지도 나는 어느 정도의 빚을 가지고 살아왔다. 20대의 내가 빚을 쌓을 때마다 신용카드 회사에도 내 한도 내역의 탭들이 쌓였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신용카드 하나였는데, 하나가 한도 초과되자 두 개가 됐고, 곧 3개로 늘어났다. 비자, 마스터카드, 심지어 디스코버Discover까지! (*물론 적어도 수년 동안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는 나 같은 놈에게까지 신용카드를 만들어 줄 정도로 무책임하진 않았다.)그렇지만, 나쁘진 않았다. 나는 그 패턴에 성공적이라고 본다. 나는 그걸 다  갚을 수 있었으니까. 안 그런가? 고등학교를 갓 벗어난 새내기 시절, 나는 칼리지 과정 전체를 생략해버리고 봉급 주는 직장을 대신 찾았다. 내가 하루 10시간 - 12시간씩 주 6일, 간혹 7일까지도 일하게 “허락”해줬던 직업 말이다. 나는 그 일에 뛰어나진 않았지만, 일하는 게 어떻게 조금씩 늘어가지는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9살이 됐을 때 나는 연 5만 달러를 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6만 5천 달러를 쓰는 놈이었다. 불행히도, 내가 수학에 졸라 잼병이었던 것이다. 한도 초과 신용카드가 6개나 쌓이기 전에 나는 금융적으로 계산이란 걸 좀 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역주) American Express 회사 카드가 신용도 요구사항이 좀 더 높은 듯하다.


    그래 놓고도 22살에 나는 흔히들 하는 방식으로 내 첫 번째 승진을 자축했다. 교외 지방에 집값이 떨어지지 않을 집을 하나 짓는 것이었다. 내 생활패턴의 모든 것들이 이 결정을 납득시켰다. 심지어 철밥통 ‘투자'를 했다고고 믿기도 했다. (이건 서브프라임 사태의 5년 전의 일...) 물론 그 집은 단순히 낡은 집도 아니긴 했지만, 오버사이즈이긴 했다. 2층의 기괴한 3개 침실과 2개의 안방과 풀 사이즈 지하실이 갖춰진 구조랄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충동적으로 질러버린 탁구 테이블도 있었다) 심지어 하얀 말뚝 울타리도 갖췄었다. 단언컨대 구라 아님.


    그 집을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그 시절, 뭔가 빡셌던 업무에 너무나 신경 쓰고 있었기에 결혼 예식 자체도 잘 기억 못 한다. 비 오는 날이었고, 내 아내는 아름다웠고, 결혼식 후 신혼여행차 (돈을 쏟아 부었던) 멕시코로 날아갔던 것까지는 기억한다. 하지만 다른 건 잘 기억이 안 난다. 우리가 신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갔고, 2대가 들어가는 차고에 럭셔리한 차들로 채우고 새 집을 멋진 가구들과 기기들로 채웠다. 내 빚으로 된 소유물의 정상부에 빚을 더더욱 쌓아댔던 것이다. 나는 아메리칸드림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에 올라 타있었다. 비슷비슷하게 돈을 쓰는 내 동년배들보다 몇 년정도 앞선 상태였긴 했다. 그런데 그게 고작 20대 후반인 5년 정도였지만. 그래도 나는 예외적인 케이스긴 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빚더미 인생의 10년 차, 28살.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소유물을 돌아보게 된다. 정말 어디든 내 물건들로 가득했다. 집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질러댄 것으로 가득 차 버렸다. 각각의 물건들은 물론 지름신의 순간에는 흥분과 함께 도착했지만 그 스릴도 순간이고, 곧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뒤 카드 청구서가 날아오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익숙지 않은 지름신의 후회랄까. 그래 놓고 나는 또 이걸 반복하고, 소비의 거품에 빠져버리고 있었다. 행복과 비스끄무리한, 아리송한 감정은 쫓으면 쫓을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행복이란 아주 작고도 멀리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잘못된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었던 셈. 아오 -_- 소유물들이란 게 제 기능을 못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실, 그 반대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행복 대신에, 스트레스와 불만족, 빡침 등과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어지럽게 쌓여만가는 빚까지. 최종적으로는 우울까지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일하는 것 외의 인생에 쏟을 시간이 없게 되었다. 대개 주 7-80시간 일을 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 물건들을 위해 돈을 내려고 말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인 글 쓰는 것과 책 읽는 것, 쉬는 것, 가장 친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쓸 시간도 전혀 없었다. 심지어 친구랑 커피 먹을 시간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었다. 스스로도 내가 내 시간을 컨트롤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결국 내 인생을 컨트롤하지도 않기 시작했다. 이건 그야말로 충격적인 깨달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고백한 것들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있다. 깨달음과 마주하면서 내가 바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뛰어가는 것이 아닌, 걷는 걸로! 스스로 '라면 식사 플랜'이라고 일컫는, 필요치 않은 욕구나 취향들을 모두 잘라내는 소비 방향으로 살게 됐다. 그것도 2년 동안 쭉. 큰 집을 팔고 작은 아파트로 들어갔고, 나만의 차를 사서 새 것에 대한 고려 없이 계속해서 드라이브를 했다. 그리고 신용카드를 잘라버리고 모든 걸 현찰로 내기 시작했. 그런 식으로 딱 필요한 것만 샀다. 결국 나는 내가 생각보다 많은 걸 필요로 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의 처음으로 나는 소유물과 점점 더 멀어질수록 진짜 행복에는 가까워진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가족도 내 행동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으며, 시간이 지나자 인생은 더 깔끔해졌고 스트레스는 줄고, 심플해졌다.


    나는 차근차근 빚 갚는 데 시간을 썼고, 과잉된 소유물을 버려댔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내 돈벌이에 보다 덜 의존할 수 있었고 내 모든 시간을 잡아먹던 노동 자체에도 덜 의존할 수 있었다. 내가 간단하게 뭔가를 건너뛰거나 일을 때려치운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뭔가 확 변하기로 마음먹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긴 여정을 택해야 한다. 80%의 빚을 갚는 데까지 엄청 많은 집중을 요했고, 마침내 내가 30살이 되고 기존의 직장을 떠나게 될 땐 꽤나 지갑도 가벼워졌다. 그러나 난 여전히 빚 줄이기에 집중하고 있었고 2년의 시간을 빚이 20%로 남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절대로 그 빚 뒤로 숨어버리는 자유를 찾아내는 걸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늘, 나는 현찰을 줘서 산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미슐랑 잡지를 넘겨가며 (물론 이것도 현찰로 샀음) 창가 옆에 앉아 있다. 잡지로부터 주기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얘진, 점점 더 하얗게 묻혀가는 거리를 바라본다. 히치콕 영화와는 정 반대로, 하얀 풍경은 모든 희망과 약속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청명함을 보여준다. 마침내 나는 라이언 Ryan이 바보 같이 활짝 웃는 얼굴, 눈으로 범벅된 눈썹과 정리 안 된 머리카락과 함께 카페 문으로 들어오는 걸 본다. 그는 딱 봐도 만담꾼으로 생겨먹었다. 나는 그걸 듣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됐다.


By Joshua Fields Millburn




매거진의 이전글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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