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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거북 Aug 29. 2023

10. 처음이자 마지막 꼰대짓

 인하우스 마케터로 재직할 때 겪었던 일이다. 우리는 신발의 카피를 써야 했다. 50대 중년 남성 타겟이었고, 가죽으로 만들어져서 튼튼하지만 편한 그런 컴포트화였다. 신발의 반응이 좋아서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 신발의 컨텐츠와 광고를 만들어댔다.


 신발을 신고 클라이밍, 등산, 춤을 추는 것은 기본이었다. 신발을 불로 지지기도 하고, 지게차로 깔아뭉개기도 하고, 드릴로 갈아보기도 하고, 사격장에 들고 가서 총으로 쏘기도 하고, 신발을 신고 30분 걸은 뒤 발 안마사에게 발 평가를 받아보기도 하고.


 지금 차분히 글로 표현해보니 진짜 뇌절 끝판왕이다. 마케팅 활동이 아니라 거의 또라이 수준이다. 아무튼 회사 입장에선 그 정도로 사활을 걸고 있는 제품이었다.


 그 당시 나는 퇴사 후 오퍼를 받아 재입사를 한 상황이었고 퇴사 한 사이 후배가 두 명 들어와있었다. 그 신발의 광고를 진행하기 위해 카피를 작성해서 제출하는데 후배 한명이 이런 카피를 냈다.


"제발 사지 마세요, 이것만 신게 될거니까요"


 대충 이런 카피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카피를 반려하려고 했다. 부정적인 키워드가 메인에 배치되어 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으키고, 유입 후 어떻게 전환이 발생한다고 해도 싼마이 카피를 쓰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남을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나에게 카피 반려권 따위는 없었고 그냥 위 내용으로 그 후배에게 피드백 정도만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광고는 돌아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각자 돌린 광고 성과를 파악하는데 "제발 사지 마세요" 카피가 압도적 1등을 달성했다. 물론 노출 지면이 약간 싼마이 느낌이 나는 구글 지면이기도 했고, 후킹성 카피로 인해 초반 노출과 클릭을 많이 받고 그로 인해 머신러닝의 간택을 받았겠지만. 아무튼 반려하려고 했던 카피가 수 많은 카피와 광고를 제치고 1등을 먹은 것이다.


 그 후배는 나에게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물론 노출과 클릭만 잘 받는게 장땡은 아니다. 광고를 돌리는데는 여러 상황이 있고, 브랜드의 결, 메시지를 어느정도 녹여내는 것도 중요하다만, 중요한 점은 내가 꼰대짓을 해서 카피 하나가 묻힐 뻔했다는 점이다.


 나는 관리자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관리자 역할에 대해서 몇 글자 적어보고 싶다.


 관리자의 첫번째 역량은 팀원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잘 알아야 한다. 잘 알아야 명확한 지시를 하고 정확한 피드백을 줄 수 있으며, 팀원들에게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다. 마이크로 매니징과는 다른 얘기다. 그리고 다른걸 다 떠나서 잘 알아야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


 두번째 역량은 팀원들이 하고자 하는 것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답이 없는 마케팅 업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짜고짜 반려하는게 아니라 부족하면 피드백하고 개선시켜 더 잘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세번째 역량은 개인적인 생각인데 닮고 싶은 인생이어야 한다. 관리자라고 앉아 있는데 박봉에 매일 욕먹고, 무능력하고, 지저분하고, 늦게 집에가면 안된다. 특히 중소기업에서는 연공서열에 따른 보상이 숫자로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아 2년 버티고 과장달면 0000원 받으니까 버텨야지"가 안된단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중소기업 관리자는 본인의 인생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힘들지만 조금 버티면 000팀장님처럼 돈도 많이 벌고 차도 좋은거 타겠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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