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을들 화이팅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으나, 대한항공의 모 임원이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컵을 던져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질을 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물컵까진 아니라도 볼펜을 맞아본 적은 있어서 그냥 씁쓸하게 웃어 넘길 수 있었다.
대략 1년간 광고주가 없던 암흑같은 시기를 이겨냈다. 운칠기삼이라 했던가, 동기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영업 실적이 없는 "나" 혼자였고,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글로벌 브랜드와 제안 미팅을 하게 되었다. 그 브랜드는 워커로 유명한 브랜드였고, 블랙과 옐로우의 조합이 인상적인 브랜드였다. 그리고 신으면 발이 아프기로 유명했다. 이 정도 했으면 패션 브랜드에 관심이 어느정도 있는 사람들은 다 눈치 챌 것 같다.
미팅 후 이관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 온라인 광고 예산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본부 내에서 흔치 않은 "글로벌 브랜드" 광고주였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고 성공사례로 발표도 했다.
해당 브랜드는 총괄 이사와 실무자 대리, 그리고 밑에 인턴이 있었다. 실무자 대리님과는 오래 호흡을 맞추면서 좋은 인연이 되었다. 다른 얘기지만 나에게 소개팅을 해주기도 했다. 광고주가 AE에게 소개팅을 해준다? 정말 흔치않은 일이다. 아무튼 실무자들과 나의 관계는 괜찮았으나 그 이사님이 문제였다. 지금도 잊을수가 없는게 첫 미팅을 간 날 내가 준비한 보고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볼펜을 집어 던졌다.
볼펜을 내 얼굴에 맞추려고 직접적으로 집어 던진건 아니었지만 책상에 집어던진 볼펜이 튕겨나와 나에게 맞았다.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실무자 대리님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이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팀장님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미팅 끝나고 팀장님에게 보고 전화를 거는게 너무 두려웠다. 광고주를 만족시키지 못했으니 크게 혼나겠지? 하 내일 사무실 어떻게 가야하나.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나는 혼나지 않았고, 그 때 팀장님이 해주신 말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다음 달부터 거기 미팅은 나랑 같이 간다. 쫄지마라, 그깟 광고주보다 내 팀원이 훨씬 소중하다. 거기는 내가 집중적으로 케어할거고 혹시라도 내 보는 앞에서 한번만 더 꼬롬하게 굴면 바로 우리가 먼저 계약 해제해버리면 되니까, 쫄지마라. 고생했다. 부산와서 보자."
그 당시 나는 실적 부진으로 인해 심리적 압박을 매우 강하게 받고 있었고, 겨우겨우 하나 가지고 온 브랜드 마저 볼펜을 맞을 정도로 클레임이 심해 "정말 이 일이 나랑 안맞나보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그런 상황에서 팀장님의 말씀, 우리는 네 편이다. 라는 메시지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게 트라우마를 만들어 준 그 브랜드는 꾸준히 실적을 개선시켰고, 퇴사하기 직전까지 관리함으로서 제일 오래 관리한 나의 상징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최악의 고비가 기회가 된 셈이다.
저 일화는 2015년의 일화이다. 그 당시에는 갑질이니 을질이니 하는 논란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AE로서 흔히 겪는 일인가보다 하며 넘어갔었다. 어떠한 고난이 찾아와도 이 악물고 버티는 낭만이 있었다. 요새는 그러지 않겠지만. 근데 낭만이고 나발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면 안되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혼자 이 악물고 버티지 않기로 했다.
볼펜을 맞고 돌아온 나를 팀장님이 감싸주었듯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땐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돌아오면 잘잘못을 떠나 진심으로 감싸주자. 혼자 살아남으려 하면 결국 혼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