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위협을 느끼다
내가 몸 담았던 광고 대행사는 서울에 본사가 있었고, 나는 부산 지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온라인 광고 대행사들이 상향 평준화가 많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다니던 대행사가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지방에 지사가 있는 거의 유일한 광고 대행사였고, 서울에 광고주와 미팅을 하러 가면 광고주들은 너무 당연한듯이 내가 서울에 근무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우리나라는 철저히 서울 공화국이고, 광고/마케팅 업계에서는 이 현상이 더 심화된다. 진심으로 부산에는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인지, 광고주에게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곤 했다. 그냥 말해주지 않는 정도에서 적극적인 거짓말로 변해갔다.
난감한 상황은 항상 발생했다. "대리님, 저 지금 근처 지나가는 중인데 잠깐 짧게 미팅할까요?" / "사무실로 간식 배달 시켜 드렸으니까 드세요" / "비상 사태인데 죄송하지만 내일 당장 미팅 좀 가능할까요?" 등의 공격(?)에 전혀 대비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부산에 있다는 사실을 왜 굳이 숨기나 싶었는데, 부산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은근 얕잡아본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산지사 사람들은 부산 쪽 회사들 광고 하는거 아니었나요? 우리는 서울인데 왜 굳이 부산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나요"와 같은 클레임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산 지사의 AE들은 광고주 미팅을 하러 서울까지 당일 출장을 최소 月 1회 다녀야 했다. 이게 육체적인 타격이 엄청났다. 처음에 광고주가 몇개 없을 때야 월 1~2회 다녀오지만 직급이 올라가고 광고주가 많아지면 당일치기 서울 출장이 월 3~4회로 늘어나곤 했다.
서울을 다녀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이다. AE 한명이 하루종일 자리를 비우고, 그들의 왕복 교통비를 생각하면 무시하지 못할 비용인 것이다. 그래서 서울로 출장을 보낼때마다 반드시 가망 광고주 미팅을 억지로라도 잡아서 최소 2~3개의 미팅을 잡아서 올라가게 했다.
입사 2년차, 한창 갈려 나갈때 일이다. 일이 많아서 새벽 야근을 해야 했다. 지금도 그 날은 잊지 못한다. 새벽 2시 넘는 시간까지 야근을 했다. 그리고 새벽 05시 20분 부산발 서울행 ktx 첫차를 타고 서울에 출장을 가야 했다. 사무실에서 두시간 정도 엎드려 쪽잠을 자고 출장을 갔다.
기차에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출장은 보통 광고주에게 성과를 브리핑하러 가거나, 제안 미팅을 하러 가는 자리였기 때문에 준비한 자료를 공부하며 올라갔다. 9시 첫 미팅을 시작으로 3건의 미팅을 끝내고, 오후 다섯시 정도가 되었다. 나는 파김치가 되었다.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서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속도 모르는 광고주가 얘기 했다.
"대리님, 저번달 실적도 좋은데 부대찌개에 소주 한잔 어떠신가요? 제가 근처에 잘하는 곳을 압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참고로 업무적인 인연이든 친구든 저녁을 같이 먹고 소주를 마시는 걸 매우 좋아한다. 너무 고마운 마음씀씀이지만, 피로도가 한계까지 차오른 상태에서는 무리였다.
클라이언트가 요청하는데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하겠는가. 기차표를 취소하고 부대찌개집으로 갔다. 술자리는 으레 그렇듯 2차로 이어졌다. 만취한 상태로 11시 넘어 서울발 부산행 ktx 막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서 또 40분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다음날, 정상출근을 했다. 하루 자리를 비워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외근 보고서를 썼다. 하지만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머리가 계속 띵했으며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멀쩡한 상태에서의 숙취도 힘든데, 살인적인 격무와 수면 부족 상태에서의 숙취와 장기간 기차 이동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결국 팀장님께 보고 드리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링겔을 맞으러 갔다. 이 와중에 조퇴를 하거나 업무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점심시간에 갔다온게 킬포이긴 하다. 커피와 핫식스를 달고 살면서 나는 강하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저날은 정말 이렇게 살다가 쓰러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일본에서 조사한 자료를 본적이 있는데, 과로사 하는 직군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게 광고대행사 AE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AE들이 과로로 힘들어 하고 있을 텐데, 다들 몸 잘 챙기면서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