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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짱 Jun 03. 2021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와 죄책감 사이

오래전에 친구 K에게 큰돈을 떼인 적이 있다. 사실 K가 하는 사업이 그냥저냥 잘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안해하지도 않았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상황을 너무 잘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빠른 시간 내에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K는 급하게 집을 빼고 여러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소식이 끊겼다.


다시 K의 소식을 들은 건 같이 알고 있는 다른 친구 P를 통해서였다. 나와 같은 피해자이자 의사인 P에게 느닷없이 연락한 K는 자신이 많이 아프니 잘하는 종양학과 전문의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P는 자신이 먼저 검토할 수 있도록 그간 K가 받은 검사 결과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고, 받은 자료를 보니 이미 폐까지 전이된 위암 말기였다고 했다. P가 보기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나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네가 그런 짓을 하고 잠적을 하니 그런 병이 생겼겠지.’


P와의 전화를 끊고 맨 처음 든 생각은 이런 저주의 생각이었다.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더군다나 좋은 소식도 아닌 얘기를 전한 P에게도 순간 화가 났다. 퇴근길에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집 근처 공원에서 서성이다가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한참 보냈다.


‘여러 사람 힘들게 해 놓고 도망갔으면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 나쁜 것.’


마음이 조금은 진정된 이후에 든 생각이었다.

사실 돈이야 주식으로도 날릴 수도 있고, 보이스피싱에, 투자사기에 얼마든지 잃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본인이 만들지도 않은 부모의 빚을 오랫동안 갚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친구들한테 돈 빌리고 안 갚은 게 뭐 그렇게 죽을죄라고 죽을병에 걸린 것일까. 아직 죽기엔 너무 젊은 나이인데, 스스로도 많이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닐까.


며칠을 K에 대한 생각으로 골몰하다가 K에게 연락을 해서 나는 괜찮다고 알려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네가 큰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서 한동안 힘들었지만, 이제는 너에 대한 원망은 없으니 남은 여생 가능한 마음 편히 보내다 갔으면 한다고 꼭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널 용서했다는 걸 꼭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연락처를 열었다가 덮었다가를 반복했다. 생각처럼 전화를 걸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망설이다 결국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항암치료 중이든, 통증관리 중이든 전화는 중요하지 않아서 전화 온 줄 모르는 거겠지.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었다. 번번이 K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가 K가 사용 중인 전화번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뒤로도 드문드문 생각이 날 때마다 몇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K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


P로부터 전화를 받은 지 5개월쯤 흐른 뒤였다. 

지긋지긋해하던 세상을 드디어 떠났구나. 

나는 너를 용서했다고 결국 전하지 못했구나.


용서는 절대로 상대의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한 짓을 잊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란 내 상처의 원천이자 원한과 복수의 대상인 상대 자체를 버림으로써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프로이트의 의자, p.215)


K는 나의 용서 따위는 바라지도, 아니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나에 대한 기억 따위는 잊음으로써 진작에 스스로를 치유했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죄를 면해주는 것도 아닌, 상대가 한 짓을 잊는 것도 아닌 용서를, 나를 왜 K에게 꼭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옛 친구를 끝까지 이를 득득 갈며 원망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을까. 그저 죄책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죽음의 문전에서 힘겹게 몸부림쳤을 K에게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던 건 나의 자기애가 아니었을까. 네가 죽어도 나는 남은 생을 맘 편히 지내고 싶은 소름 끼치게 지독한 이기심은 아니었을까.


Photo by Felix Koutchinsk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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