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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Jan 22. 2022

옆집 할머니가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

욧카이치의 그 가게


며칠 전 핫서방과 '동네 맛집'으로 알려진 작은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사시간만 됐다 하면 학교 급식소가 떠오를 만큼 긴 대기열이 생기는 곳인데, 다른 마을에서 오래 영업하다 몇 년 전 우리 동네로 이전해 온 곳이라 했다. 단골손님이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모습을 보며 우리 동네 사람들도 '저기는 맛있는 곳인가 보다' 하며 줄을 서기 시작했고, 핫서방과 나도 종종 식당 앞을 기웃거리다 손님 적은 날을 골라 입성에 성공했다.


그 식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함바그'도 '치킨난반'도 아닌 '돈테키(豚テキ)'. '돼지고기 스테이크'의 줄임말로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구워 소스를 끼얹어 먹는 음식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돈테키 두 개요!" 하고 주문한 후에야 메뉴판이 보였다. 그런데 글쎄,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욧카이치의 그 가게 다음으로 맛있습니다

돼지고기 로스육 돈테키

마늘과 로즈메리 풍미 특제 소스




핫서방과 나는 메뉴판을 읽다 말고 멈췄다. 얼굴을 들어 서로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말했다.

"'욧카이치의 그 가게'다음이래."


히츠마부시와 테바사키가 나고야를 대표하는 음식이라면, 돈테키(豚テキ)는 미에 현 욧카이치 시(四日市)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욧카이치 그 돈테키 집"이라 하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 하나 있다. 나고야에 와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세계의 야마짱'을 알듯이 말이다.


욧카이치의 '그 가게'.

공교롭게도, 며칠 전 옆집 할머니와 '그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할머니는 시뽀 돌 무렵 이사를 오신 분이다. 원래는 미에 현에 살며 로스팅 카페와 찻집을 오래 운영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덩그러니 황량해진 주택과 카페를 처분했고, 차를 몰기에는 고령이 되어 운전면허도 반납했다. 고향이 아무리 좋다지만, 혼자 생활하려면 도시가 더 편하겠다고 생각했다는 할머니.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고, 편의 시설과 의료기관이 많은 곳을 찾다 우리 동네까지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치치'라고 하는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할머니는 처음부터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핫서방과 결혼하며 일본에 왔다는 내게 "우리 딸도 독일인이랑 결혼해서 독일에 갔어요. 손자 나이도 딱 시뽀 정도인데 실제로 만나는 날보다 사진으로 보는 날이 더 많아요. 최상 부모님도 그렇겠네요. 딸도 처음에는 독일어 배우랴 아이 키우랴 일하랴 허둥지둥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림책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네요. 최상도 잘 할 거예요. 천천히 적응하세요." 하며 내 입장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깊이 헤아리셨다.


나도 할머니에게 마음이 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할머니의 취향에 매력을 느꼈다. 할머니가 내려주는 커피. 할머니가 말아주는 말차. 할머니가 권하는 쿠키와 빵 등등등! 몇십 년간 카페를 하던 분이라서일까, 우리 동네에서 'Pick'하는 모든 것이 훌륭했다.

자신의 선호와 취향을 뚜렷하게 알고, 노년에도 그것을 즐기며 살 수 있다니. 할머니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노년기의 나도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겠구나. 소소하고 평범하게,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면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가 가는 슈퍼마켓이 우리 동네 유일의 유기농 식품 판매점, 존네가르텐(ゾンネガルテン)이라는 것도 좋았다. 내가 한국에서 일했던 곳이 생협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국적을 불문하고 그런 공간에서 물건을 찾는 분들과는 묘한 접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할머니도 내가 한국 생협에서 일했다는 걸 재밌게 생각했다.

독일에 간 딸도 생태 마을 커뮤니티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시며, 서유럽으로 여행을 가면 그 마을도 꼭 둘러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하셨다. 게다가 왕년에(?) 버블경제를 겪으신 분 답게, 세계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통했고 외국어도 능숙하게 사용하셨다. 일본 밖의 세상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대하기 편했다.

살아온 배경, 국적, 연령이 완전히 다른데도 대화가 재미있다니! 70대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는 확실히 이웃 복이 있다. 이런 할머니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오셨으니 말이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할머니를 대하기 낯설고 어려운 부분도 있다. 특히 재밌게 수다를 떨다가도 헤어질 때 허리를 너무 깊이 숙여 인사하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바른생활 혹은 도덕 교과서로 '노인 공경'을 배운 나는 어떻게든 할머니보다 더 깊이, 더 긴 시간 허리를 숙여야 한다는 일념이 있다. 내가 허리를 안 들면 할머니는 또 두 번, 세 번 허리 굽혀 인사하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인사. 이럴 때는 너무 곤란해서 어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이웃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씩 쌓이며 할머니와의 친밀도가 단단해져 가는 것은 분명하다. 할머니가 스마트폰 구입과 설정 같은 일을 어려워하시면 핫서방이 출동하고, 통신사에게 바가지 쓰는 일이 없도록 하나하나 깊이 관여한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주말 아침마다 '핑퐁~' 하고 벨을 눌러 직접 내린 커피와 갓 볶은 아몬드를 챙겨 주신다. 머리를 안 감거나, 뿔테안경을 쓰거나, 눈썹조차 안 그린 자연인의 모습도 할머니에게는 보여줄 수 있다.


할머니가 안 보이면 걱정이 된다. 집에 있는 귤이라도 하나 챙겨들고 우리도 '핑퐁~' 한다. 최근 근황을 들어야지만 안심이 되어서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귀담아듣는다. 

우리는 할머니의 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있다. 신장이 안 좋으시다는 사실, 코로나 백신 접종일, 할머니가 다니는 병원, 드시는 약, 못 드시는 음식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 하나는 할머니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이다. 할머니 본인은 페스코라고 주장하시지만, 실은 비건에 가깝다는 사실도.





할머니가 채식을 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이사를 왔을 때부터 들었다. 하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육식을 하는 사람에게 "육식요? 육식을 왜 하는데요?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어요?"라고 묻지 않는 것처럼,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도 "왜요? 채식하는 이유가 뭔데요?" 하고 캐묻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는 때가 되면 대화 속에 알아서 녹아 나올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채식인에게 둘러싸여 있는 나는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왠지 모를 미안함이 있다. 필요성은 알지만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장기기증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선뜻 실천하기는 어렵듯이 나에게는 채식도 그런 종류다. 그러니 채식을 하고 있다는 사람을 보면 대단한 마음이 들면서도, "저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아..." 하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무튼. 할머니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은 알지만 왜 채식을 하는지는 모르고 살던 어느 날. 매번 커피를 내려 주시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번에는 내가 한국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나섰다. 메뉴로는 채소 고명을 듬뿍 올린 '잔치국수'를 제안했다. 해물 육수 정도는 괜찮지 않으시겠냐고, 혹시 해물 육수를 안 드시면 채소나 다시마로만 육수를 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일부러 레시피까지 바꾸어 가며 요리를 하면 너무 미안할 것 같다고 거절하셨다. 바꾼 레시피가 최상이 정말 좋아해서 먹고 싶은 음식은 아니지 않냐며. 우리가 비록 함께 식사를 할 수는 없지만, 커피나 차를 나눌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고 하셨다. 꼭 같이 식사를 하고, 그 식사가 같은 메뉴여야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거였다.


식사를 대접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내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채식을 하기까지가 쉽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는 말을 안 했지만, 사실은 미에 욧카이치에 있는 돈테키 원조 가게가 내 친정이에요. 아버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돼지고기를 만졌어요. 워낙 유명하고 장사가 잘 됐으니까요. 아버지는 돼지를 몇 마리나 잡았을까요? 돼지 많이 잡은 덕분에 생활도 하고, 학교도 갔지만 너무 괴로웠어요. 고기 냄새며, 그걸 손질하는 아버지를 보는 게...

그래서 어릴 땐 하루빨리 독립하고 싶었어요. 집을 떠나면 채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러고 보면 지금은 혼자 살면서 나한테 편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초대를 거절해서 미안해요. 음식으로 부담을 느끼는 게 힘들었고, 나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너도나도 먹고 싶어 문전성시를 이루는 유명한 돈테키 전문점. 그 식당의 딸은 아버지가 돼지를 자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고, 독립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채식주의를 선택했다. 채식하는 사람들이 가진 각양각색의 동기 중에서도 유독 놀라운 이유였다. '짜장면 집 자식은 짜장면 싫어한다더라' 같은 농담 정도를 넘어, 목사 아들이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사연과 견줄 만한 충격이었다.


동시에, 자식은 호락호락 부모 뜻대로는 되지 않는 별개의 인격체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크게 느꼈다.

'고기 손질하는 아버지'라는 동일한 모습을 보고 자라도 "돈테키라는 음식으로 전국 최고에 오른 아버지가 멋있다. 나도 노력해서 가업의 대를 잇겠다!"라고 생각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나는 지금까지 많은 생명의 희생 위에 살아왔으니, 앞으로는 육식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하는 자식도 있다. 부모의 어떤 모습이 아이를 어떻게 자극하여 어떤 길로 나아가게 될지는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이들 각자에게 달렸다.


할머니 자식들도 그런데, 채식주의자 어머니를 보고 자라도 첫째와 둘째는 채식을 선택하지 않았단다. 독일에 사는 셋째 딸만이 할머니와 닮은 생각과 성향을 가져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딸도 시뽀 또래 아이들 삼 형제 밥상에는 고기를 올린다. 아이들이 채식과 비채식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부부의 신념과 아이들 식사를 별개의 문제로 보아서 그렇다고 들었다.

이런 걸 보면 할머니네 가족들이야말로 개인주의적이다. 한 가족 안에도 서로 다른 개개인이 모여 있고, 그 개개인은 각자가 선택한 대로 살아가니 말이다.


그 이야기를 한 후로 할머니와 나는 서로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을 찾으며 교류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 다녀온 기념품으로 유기농 현미 튀밥과 볶은 깨를 드렸다. 그 깨로 말하자면, 울 엄마가 원산지 확인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깨농사 짓는 사람을 수소문해 산지에서 현장 구매하고 집에서 직접 볶은 깨였다. 이 스토리를 들은 할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와 정성이 들어갔다며 아주 기뻐하셨다.


할머니도 여전하시다. 동네 맛집에 돈테키를 먹으러 가던 날. 그날 아침에도 할머니는 벨을 눌러 커피와 견과류를 건네주셨다. 핫서방과 나는 골목길을 걸으며 "오늘 커피 맛있었지? 단 한 번도 식사를 함께한 적은 없지만, 할머니 말대로 이대로도 나쁘지 않네"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의 커피에 대한 수다를 떨며 식당으로 향했고,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고, 메뉴판을 두리번거리다 본 것이 바로 "욧카이치의 그 가게 다음으로 맛있습니다 " 였던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핫서방과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네가 느끼는 복잡한 생각 다알아' 하는 눈빛을 교환하며.





욧카이치의 그 가게,

그 가게 다음으로 맛있다는 이 가게,

욧카이치의 그 가게 딸은 먹지 않는 돈테키를 이 가게에서라도 먹겠다며 줄을 선 사람들.

아침은 할머니가 주신 커피와 견과류로 요기를 하고, 점심은 할머니를 채식주의자로 만든 돈테키를 먹는 핫 서방과 나.


엇비슷한 상황을 살고 있지만 "내 딸 같아서", "제 어머니 같아서" 같은 말은 결코 하지 않는,

그러나 친구 같은 이웃은 될 수 있는 70대와 30대.

자다 깬 민낯을 보일 수는 있어도 식사를 함께 하지는 않는,

채식주의자인 할머니와 비채식주의자인 나.







2022년 1월

새로운 개인주의 사용설명서

<이럴 거면 혼자 살라고 말하는 당신에게>를 출간했습니다

배우자, 자녀, 원가족, 이웃, 친구, 동료.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라는 개인을 지키면서도, '너'라는 개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개인주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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