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너 어디서 왔니?

내 우울증의 기원을 찾아서

by TalChuRee


우울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서는 어디서부터 내 우울증이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단연 갑작스런 임신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꿈이 좌절되던 그 순간들일까. 내 자신의 삶 자체가 존재가 부인되어야 했던 없는 삶이어야 했던 그 시절이었을까. 나는 곱씹고 또 잘근잘근 곱씹었다. 아픔을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건 정말이지 자기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짓이다.



나는 미혼 싱글맘 11년 차다. 지금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보러 오겠다고 했지만 오지 않았다. 아이를 받아준 사람은 미혼모 시설의 원장 수녀님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지점이 내 우울증의 시작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분노가 생겼을 것이라고.



그런데 처음에 나는 병원을 다니기 전까지 나는 내가 우울증인지 알지 못했다. 작은 일에도 동생에게 화를 내고 가슴이 그저 답답하고 무기력하고 아이를 재우고 나면 한없이 가라앉던 시절들.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인줄 알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래도록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도.




학창시절 나는 공부 외에는 별다른 관심사가 없었다. 친구 관계는 서툴렀고, 사회생활이라는 것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늘 나를 챙겨주는 친구가 한 명 있었고, 그 친구 덕분에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다닐 수 있었을 뿐이다. 나는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화라는 감정은 분노의 대상이 명확할 때,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 때 생긴다. 나는 어디에,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 아빠였을까. 관계를 맺었던 그날 밤이었을까.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이었을까. 입양을 결정해놓고 1년 동안 미혼모 시설에서 없는 사람처럼 지내야 했던 시간들이었을까.



미운 것이 너무 많았다. 나 자신이 미웠고, 아이 아빠가 미웠고,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세상과 부모님이 미웠다. 그런데 그 미움은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화는 점점 안으로 접혔고, 표현되지 못한 채 쌓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이전부터 나는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목적 없이 가라앉아 있던 시간들. 2017년 처음 상담을 받았을 때 상담사는 내 상태를 ‘청소년 우울’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라는 성과지향주의에 억눌려 친구관계나 다른 모든 것들을 후순위로 밀어넣은 사람. 나라는 사람도 없던 공부기계. 그런데 처참했던 입시성적. 생각해보면 고3때 기억은 그저 뿌옇다. 누구나 그럴 수 있겠지만 나는 모범생이던 겉모습과 다르게 어느 시점부터는 자습시간에 아예 자습을 하지 않았다. 멍하기 일쑤였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혼자 웹툰과 외국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당시 기숙사 사감선생님은 저렇게 밤늦게까지 공부하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는 나를 기이해했다.



하지만 뚜렷한 증상은 아이를 낳고 나서 가장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후 우울증과 겹쳐있지 않았을까 어렵풋이 추측해본다. 가슴이 답답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던 때, 미혼모 대상 무료 심리상담을 신청했고 그때 처음 약물치료를 권유받았다. 그때서야 우울증이라는 이름이 내 상태에 붙었다.




그래서 나는 내 우울증이 정확히 어디서 시작됐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하루, 어떤 사건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화내지 않는 법만 배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감정을 처리하는 대신 버티는 쪽을 택했고, 설명 없이도 견뎌야 하는 시간을 너무 오래 살았다. 우울증은 그 결과처럼 뒤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설명을 요구받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니까 “그럴 만했는지”를 증명하라는 요구 앞에 선다. 이야기를 충분히 하면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늘 같은 결말로 끝난다. “미치지 않은 게 대단하다”, “그래도 잘 버텼다”는 말들.



나는 그 말들이 싫다. 그 끄덕임들 앞에서 한 번도 가벼워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명을 끝낼수록, 나는 더 미묘하게 혼자가 된다. 이해는 판결처럼 내려지고, 그 순간 나는 다시 평가의 대상이 된다.



지금의 나는 내가 왜 우울한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도 왜 계속 증명해야 하는지가 더 지친다. 이 글은 이해를 구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다 듣고 나서 “그럴 만하다”고 말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아픔마저 납득되어야만 허용되는 이 구조에서 한 발 물러나고 싶다.



설명하지 않아도 아플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이제는 나 자신에게 먼저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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