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안녕, 다카마쓰
예술의 섬이라 불리는 나오시마.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한 곳이었다. 섬에 미술관이 있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막연한 상상을 했었다. 당시 그려진 그림은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 위 몇 평 남짓한 작은 섬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작은 섬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미술관이 있는 모습이었다. 선선하고 온화한 바람이 불고, 배는 푸른 파도를 헤치며 흰 거품이 좌우로 튀기며 통통 미술관을 향하는 마음은 어떨까 상상했었다. 머릿속으로만 다녀왔던 상상의 섬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이야기를 나눠본다.
여행을 시작하며
수고했어 10월
계획했어, 무계획으로
1일
안녕, 다카마쓰
2.7km 아케이드
살기 위해 우동
원동과 서구 사이, 미술
자연과 도시 사이, 리츠린
애피타이저, 야키토리
칵테일과 멧돼지, 구운 채소. 유기농을 더한
1인 오마카세와 새우
2일
안녕, 나오시마
골목길, 산길
베네세와 안도 타다오
집 프로젝트
히치하이킹과 달리기
2인 오마카세와 2점
동네 친구들
여행을 마무리하며
여행을 시작하며
10월, 작지 않은 전시를 마무리하고 심신은 전소 상태에 가까웠다. 123명의 예술가, 30여 개 예술공간, 3번의 오픈스튜디오. 사업을 주최한 은행, 대행사가 만든 여러 이해관계들 속에서 일은 무거웠다. 전시의 광고엔 '역대급'이라는 표현이 계속 등장했다. 대로변의 전광판, 인스타그램 피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진정 역대급이었다. 심리적 압박의 부하가 오고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질 때쯤, 짝꿍님과 함께 나오시마를 가기로 했다. 그녀도 큰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터라 둘 다 짧게라도 '쉼'이 필요했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떠날 때 목적지와 가서 꼭 해야 할 것들 몇 가지만 정하고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 우리끼리의 규칙 같이 되었다. 2022년 초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도 '남쪽으로 간다', '바다를 본다' 두 가지만 정하고 갔었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준비 없이, 최소한의 계획만 가지고 떠났다. 심지어 2박 3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사전에 '공부'라는 것을 좀 하고 가야겠다는 일말의 생각은 있었다. 단행본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손에 들고 있었고, 검색을 통해 유튜브에 소개된 영상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서 보려 하지 않았다. 애를 써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를 안 쓰기로 했다. 이 대목에서 J들은 학을 떼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보를 학습할 힘이 모두 소진되어 있었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상상 속에 존재했던 섬으로 떠났다.
다만, 지중 미술관은 예약 없이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일하게 예약을 진행했다. 참, 숙소도. 그렇게 "나오시마를 간다" "맛난 음식을 많이 먹고 온다" 그렇게 두 가지 문장을 가지고 출발했다.
어쩐 일인지 이번 여행은 늦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그러했다. 출국 전날 공항 앞에 1박을 하고 출국을 할 예정이었다. 예상보다 늦어진 퇴근으로 새벽 1시가 넘어 체크인을 할 수 있었고, 안정적으로 출발하기 위해 새벽 5시 반에 공항철도를 타야만 했다. 부족한 수면으로 멀어지는 한반도에 인사할 겨를도 없이, 뒤로 젖혀지지 않는 의자에서 졸도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것 같은데 우린 이미 일본에 있었다. 설레는 맘으로 일본땅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여유도 없었다. 다카마스 공항은 국제공항이라기엔 매우 작은 규모의 공항이었다. 어플로 사전에 모든 등록을 할 수 있었던 인천공항을 지나 모든 곳에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 있는 다카마쓰 공항으로의 이동은 다른 시간대에 와있는 것 같은 착시까지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1일
버스를 타고 항구 인근의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신용카드 없이 현금으로 버스를 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종이티켓을 확인하는 버스기사. 우린 자연히 인사를 했고 여유로운 맨 뒷자리에 착석했다. 오른편엔 모녀가 나란히 앉아 장난을 치다 이내 잠이 들었다. 슬며시 오른팔 쪽으로 넘어오는 아이의 머리에 밀린 가방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온화한 기후, 열대 식물들로 창밖의 풍경은 제주도와 동남아 어느 사이에 와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느긋하게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 속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마을의 모습은 을지로의 옛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평화로웠고 아름다웠다. 이런 공간을 만드는 이들은 어떤 규칙들로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들의 삶도 보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울지. 그리고 만약 서울의 중심이 정비구역이 아닌, 근대건축 유산이 있는 곳으로 사랑받고 관리를 받아왔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경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지. 일본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 우리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체크인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한 숙소에 짐을 맡기고 거리고 나왔다. 허기졌다. 식량을 찾아야 했다. 그녀를 더 배고프게 둘 수 없었다. 살고 싶었다. 길 건너편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거대하게 덮은 아케이드가 보였다. 상점가임이 분명했다. 넓고 선명하게 뻗은 길을 걸었다. 높은 지붕은 햇빛을 투과하되 비를 맞지 않게 하였고 우리는 안전하게 도시를 걸었다. 며칠 전 연대를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다.
연세대 건축과에서 진행한 크리틱에 외부 전문가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10여 명의 학생들은 을지로에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조사하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았다. 한 친구는 다방 아주머니들의 이동을 추적하며 지역의 커뮤니티를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조사하였고, 한 친구는 시청부터 DDP까지 연결된 지하상가와 지상이 어떻게 연동되는지, 철공소 사장님들은 어디서 밥을 먹는지, 제조 공정과정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의 주제로 연구했었다. 결과적으로 연구들을 하나로 모아 서울 도심의 장점을 유지하며 지속할지에 대한 연구로 귀결되는 수업이었다. 크리틱 당시 교수님을 통해 일본의 도시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권을 개발할 때 길을 경계로 블록을 지정하고, 길과 마주한 블록 외벽을 중심으로 개발한다." 교수님께서 슥슥 그려낸 스케치가 현실에선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는데 그런 거리를 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케이드를 걸으며 어떻게 도시 계획이 합의되고 진행되었을지, 상인회의 모습과 그들의 역할은 어떤 것일지가 궁금해졌다.
다카마쓰 중앙상가는 총 8개의 상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제일 긴 아케이드로 총길이는 약 2.7km라고 하니 '을지로 입구'에서부터 'DDP'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도보로 40분 내외에 해당하는. 방문 당시 할로윈 관련 행사, 플리 마켓 등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세대가 광장을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기획되는 행사는 야외이면서 실내이기에 우천 걱정은 전혀 없이 진행할 수 있는 다각도로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많은 상상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었다.
✓ 다카마쓰 중앙상가 : 소개 페이지
우동집을 찾아야 했다. 밀가루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나의 목숨을 위해. 토요일이라면 부산할 것 같은데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많은 식당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상점과 외국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카페만이 열려 있었다. 카가와현은 우동이 유명하다던데. 왜 파스타만 보이는가. 거리에 퍼지는 바베큐 냄새가 식욕을 더 돋울 때쯤 유명할 것 같은 우동집을 찾았다. 사람이 가득했고, 직원들은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특유의 억양과 발성으로 맞아줬다.
자리를 잡자마자 시원한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구글 번역기를 통해 봐도 어떤 메뉴인지 자세히 알긴 어려웠다. 대표 메뉴라고 소개받은 우동을 하나씩 시켰다. 우동은 면이 아주 탱글탱글 했고, 맛은 슴슴했다. 한국에서 먹었던 자극적인 우동맛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뭔가 아쉬운 맛. 하지만 가게 한켠에서 은은하게 온기를 머금은 육수에 담긴 어묵꼬치는 간장이 아주 잘 배어 있어 부족한 간을 보완하기 충분했다.
글을 쓰면서 우리가 갔던 첫 식당이 어디인지를 찾고자 구글지도를 부여잡고 긴 시간 뒤져 봤지만 찾지 못했다. 당시 길이 익숙지 않아서 어딘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기억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똑똑한 임은 아직도 동선을 기억하고 있었고 구글지도를 켠 지 단 몇 분 만에 가게를 찾아냈다. 나에겐 허기져서 번역을 위해 찍었던 사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역시 기록을 해놓으려거던 그때 그때 하는 게 제일이다. 혹은 똑소리 나는 동행인과 함께 해야 한다.
✓ 사누키멘교 효고마치본점 さぬき麺業 兵庫町 本店 : google map
아케이드를 구경하며 미술관으로 향했다. 배를 채우고 나서야 열려 있는 식당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필요한 것과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허기를 달래니 걸음에 여유가 더해졌다.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누군가 싸게 가방을 샀다는 매장에 들러보기도 하고, 자색고구마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1000엔이 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인근에 있는 다카마쓰시 미술관에 도착했다.
입구를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펼쳐진듯 했다. 광장을 중심으로 스테인리스로 마감재를 사용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으며 천장은 투명해 하늘이 훤히 보였다. 쓱 둘러보니 근현대 미술품 전시와 공예품 전시, 동시대 작가 개인전, 지역 협회 단체전, 지역 아동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역의 공공 미술관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카마쓰시 미술관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근 리츠린공원에 개관했다고 한다. 이후 교통이 편리한 현 위치로 1988년에 이전하였으며 2016년에 리모델링을 마치고 재개관하였다고 한다. 미술사에 있어 여러 영역이 있겠지만 다카마쓰시 미술관은 20세기 이후 일본 미술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 왜 20세기 미술을 주로 다룰까? 다카마쓰가 항구가 있기 때문일까?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 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렇게 수입된 서역의 예술품이 항구를 통해 다카마쓰로 유입되며 소장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되었다. 이는 이후 더 공부해 보기로 하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20세기 미술의 모험:명작을 통해 본 일본과 서양의 미술⟫는 MOMAT(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소장품 순회전으로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회화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당시 서양미술사의 주류를 이룬 작가들과 주고받은 영향이 잘 보이는 전시였다. 20세기 초반부터 서유럽과 이미 많은 교역이 있었다는 것이 고스란히 그림에 담겨 있었다. 이후 산업화(과학문명의 발전)와 2차 세계대전 당시 참혹했던 전쟁의 순간, 이후에 경제 성장을 토대로 발전한 개념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전시 중간중간엔 서유럽에서 넘어온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앙리 루소, 샤갈 등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회화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공립 미술관 소장품에 근현대 미술 전시에 근대 명화들이 속속들이 껴있다는 것은 대항해시대 이후 일본이 아시아에 거대한 항구 중 하나로 역할했음 짐작 캐했다.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회화를 소비하고 감상했을지 삶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제일 맘에 드는 작품은 역시 청동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역시 클래식은 영원한 것인가. 그리듯 묵직하게 다져진 조각의 표면이 너무 맛깔난다. 금속에서 이런 맛이 난다니, 좋은 작품을 만날 때면 작가의 손길이 그려진다. 당시 서유럽의 작품들, 일본의 회화들이 병치된 설치는 서로 다르게 발전한 두 문화권이 상호 영향을 주며 발전했음을 비춰 볼 수 있었다. 조각 역시.
오귀스트 로뎅 이후 서유럽 인체 조각에 큰 변화가 생기고 이는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진다. 그중 앙투안 부르델을 통해 미술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중 일본 출신의 시미즈 다카시가 있었다. 그는 후에 권진규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시미즈 다카시를 통해 일본에도 로뎅의 조각의 흐름이 전해지는데 후지카와 유주의 시인 M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어 괜히 반가웠다. 조각의 여정이 반가웠다.
✓ 다카마쓰시 미술관 : 홈페이지
리츠린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꼭 방문하라는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케이드를 지나며 향이 좋은 커피도 한잔 샀다. 종류별 다양한 원두를 직접 볶고 있었다. 유튜브를 통해 본 일본의 커피는 맛이 없다는 평이 많았다. 인구 및 국토의 면적 대비해서 한국이 일본보다 커피 시장이 크지만 뭐 크게 다르겠냐는 생각을 했었다. 큰 기대 없었다. 하지만 향이 좋았다. 그렇게 따뜻한, 향긋한 커피 한잔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 스코프빈 타마치 로스팅소 スコップビーン田町焙煎所 : google map
어느덧 길은 좁아졌다. 천장을 덮었던 투명한 지붕도 사라졌다. 그렇게 골목을 걸었다. 한적하고 편안한 느낌의 골목.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도록 경계석이 매끈한 인도와 사람이 보이면 양보하는 차들 때문에 걸어가는 길이 좋았다. 걸어가는 동안 점점 먹구름이 다가왔다. 공원에 다 다달았을때 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으며 들고 온 커피잔을 어디에 버려야 하냐고 물으니 자기들이 버려주겠다며 수거해 줬다. 이런 친절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미안했지만 고마움을 더했던.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교복을 입고 마사토 위로 캐리어를 끄느라 애쓰는 아이들은 공원 관람보다 일탈의 공간에 온 것 자체가 즐거워 보였다.
우리도 즐거웠다. 공원 초입에 위치한 '상공장려관 商工奨励館'(일본식 발음은 다를 것) 본관에 들어서 공원에 대한 역사를 살핀 후 2층에 올라서니 공원이 내려다 보였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점점 강해졌다. 좋은 타이밍에 큰 비를 피하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고요함을 즐기다 '이거 와인 한잔 하면 딱 좋겠는데?' 하는 생각으로 1층 서관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레스토랑은 일찍 마감을 한 관계로 음주는 저녁 식사로 미루었다. 곧 비가 잦아들고 최대 다이묘의 정원으로 발을 디뎠다.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졌고 걷는 길마다 높이가 달라졌다. 시선에 따라 바뀌는 공원의 다양한 모습은 지루할 틈 없는 아름다움을 선물해 줬다. 흐르는 연못들 사이엔 큼지막한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고, 바게트 모양의 잉어밥을 원내 위치한 매점들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연인, 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잉어에게 밥을 줬다. 어떤 이는 잉어들 사이에 던져 경렬 한 잉어들의 힘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어린아이는 외곽에서 중앙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잉어를 위해 멀리 던져주려 애쓰기도 하였다. 잉어밥 주는 모습도 각양각색이었고 화려한 무늬로 경렬 하게 움직이는 잉어들의 모습은 모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매점에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도 팔았는데 우리는 맥주와 떡꼬치를 샀다. 잉어들이 가열차게 밥 먹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에너지 보충을 하였다.
한쪽은 맑은 하늘, 한쪽은 먹구름이 있었다. 공원도 한쪽은 산, 한쪽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나무 너머로 보였다. 대비되는 풍경 속에서 여유를 한참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공원을 천천히 감상하기엔 시간이 다소 부족했다. 걸음에 종종을 더해 큰 모습은 다 눈에 담기로 했다. 공원은 실망시키지 않고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봄이 되면 피어날 벚나무들은 다른 계절에도 로맨틱할 리츠린을 상상하게 했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미술계 종사자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야돈을 모티브로 만든 많은 기념품과 지역 특산품이 있었다. 그중 모나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한참을 걸은 후 당분 섭취는 행복감을 끌어올린다. 너무 맛있었다. 또 먹는 날이 오길.
✓ 리츠린공원 : 소개 페이지
리츠린 공원을 나서면서부터 본격적인 먹자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건 2일 밤. 2일 최대한 맛보고 마시리라를 다짐하며 왔었다. 그 시작이 열렸다.
처음 레이더망에 걸려든 집은 야키토리 집이었다. 리츠린 공원으로 가는 길에 들르고 싶었던 가게였다. 천을 걷어내고 실내로 들어서니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하지만 거기까지. 영어를 쓰니 모두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겠지만, 모바일로 주문하는 방법에 대해 안내해 줬고 우린 꼬치와 고등어를 시켰다. 갈증이 났기에 술을 먼저 찾았다. 짝꿍님은 시원한 맥주 한잔을 시켰는데, 사이즈가 큰 걸로 달라고 했다. 정말 큰 게 나왔다. 500cc보다 양이 훨씬 많아 보이는. 나는 따뜻한 니혼주 한 병을 시켰다. 따뜻하게 몸이 녹으며 느슨해짐이 느껴졌다.
✓ 아키토리 코네코 焼鳥 こねこ : google map
입가심을 하고 다시 여정을 떠났다. 골목을 따라 걸었다. 길을 한번 건너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아케이드에 접어들기 전 눈에 딱 들어오는 가게 하나 있었다. 비워진 술병들이 보였고 안쪽 조명은 따뜻해 보였다. 목재 바 테이블엔 한 숙녀분이 앉아 계셨고 사장님, 사모님으로 보이는 두 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입간판엔 'close'라고 쓰여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으나 언제 다시 다카마쓰를 오겠나. 두 번은 없다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장사하는지를 물었다. 사장님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장사를 한다고 들어오라 하였고, 밖으로 나가 입간판을 'open'으로 바꿨다.
우리도 그렇게 바에 앉았다. 사장님 내외는 영어가 익숙지 않았고, 그건 우리도,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메뉴판을 보면서 주문했다. 모든 재료는 유기농으로 만들어지며 칵테일엔 과일이 들어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다 먹어봐야겠다는 심상으로 하나씩 시켰다. 생과일을 정성껏 깎아 믹서기에 일부 넣고 갈아내며 칵테일을 만들었다. 거품이 너무 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한국에선 맛보기 어려운 서양식 배, 오이, 살구 비슷한 어떠한 과일 등 다양한 지역 과일이 올라왔다. 그중에서 오이는 익숙했지만 갈아서 만든 칵테일은 처음이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향이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칵테일이었다.
안주를 보고 짝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번역기를 통해 보니 '멧돼지'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번 먹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어릴 적에도 먹어본 적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건 확실치 않다. 여하튼 성인이 되어 먹어본 멧돼지 고기는 너무 익히면 질겨져서 익어 갈 때쯤 먹어야 했었다. 머릿속에 자꾸 '모노노케 히메'의 멧돼지들이 떠올랐다. 짝꿍은 설마 멧돼지겠냐, 햄처럼 나오지 않겠냐 이야길 했다. 사장님께 여쭈니 진짜 멧돼지가 맞다고. 그럼 당장 먹어봐야겠다 싶어 주문을 하였다. 고기는 다소 질겼다. 아마 잘 익어서일 것이다. 여기서 백미는 구운 야채들이었다. 고기와 같이 볶아 육향이 은근히 입혀져 있었고, 아주 신선했고, 적당히 잘 익어 식감이 좋았다. 그렇게 안주가 또 술을 불렀다.
궁금했다. 흔하지 않은 고기를 굳이 쓰는 이유가 있는지. 맛 때문인지, 수요가 많아서 저렴한지. 사모님에게 여쭈었다. 지역에서 흔히 먹는 고기인지. 하지만 사모님은 되물으셨다. 한국에서 흔하게 먹는지를. 우리는 아니라고 딱 한번 먹어본 적 있다는 답을 드렸고, 사모님 역시 일본에서 흔히 먹는 고기가 아니라는 답을 주셨다. 그럼 도대체 왜? 사모님은 자기도 모르겠다며 사장님을 데려 왔다. 사장님이 수줍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 읽었던 책 중에 '~~~ 백작'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 멧돼지 고기가 나온다고 했다. 그 추억 때문에 메뉴를 개발하게 되었다.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낭만적임에는 틀림없다. 어릴적 추억을 마음에 간직한 이런 멋을 아는 사장님이라니.
다음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요리는 어떻게 개발하시는지 여쭈었다.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답. "YOUTUBE"
언어는 미숙했으나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익숙했다. 그리고 그 부부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냥 장사만 하시는 것 같지 않았다. 가게에 꽂혀 있는 책들은 인문학 서적이 많았고, 음향장비도 신경 쓴 것 같았고, 어디선가 받았던 묘한 느낌이 있었다. 인스타를 물어 찾아보니 역시나 건강한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드려고 애쓰고 있었고, 때마다 가게에서 작은 공연도 여는 곳이었다. 음, 어떤 면에서 을지로의 작은물과 닮은 느낌. 호기심이 폭발해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것저것 물었다. 어떻게 시작했는지, 요리는 어떻게 배우셨는지, 재료는 어떻게 조달하는지, 공연은 어떤 분들이 와서 들으시는지 등등. 대화의 결론은 부부는 서울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고 간장게장이 너무 맛있었다고 한다. 그럼 다시 서울에 올 땐 간장게장 맛집으로 안내하기로 하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한가람으로 안내해서 나도 오랜만에 그 핑계로 맛난 음식을 먹어 볼 생각에 신이 났다.
스시를 먹고 싶은데 어디를 가야 할지. 토요일에도 가게들이 많이 안 열던데 어딜 가야 일요일(다음날)에 스시를 먹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스사키츠 寿し勝를 소개해주셨다. 대략적인 위치와 이름을 메모하고 우리는 다시 보기로 했다. 모든 술을 다 마셔보고, 옆테이블의 사람들과 사장님 내외와 짧은 언어였지만 소소한 담소를 나누며 둘이서는 다 못 먹어볼 음식들도 시켜서 같이 나누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그랬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오랜만에 포만감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 후지즈카초 마르쉐 藤塚町マルシェ : google map
알딸딸하고 딱 기분 좋은 상태로 숙소를 향했다. 아케이드는 밝고 적막했다. 그렇게 걸어가다 걸어가다 걸어가다 그냥 갈 우리가 아니었다. "한잔만 더 할까?" 그렇게 아직 닫지 않을 가게를 찾아갔다. 중심 거리에서 벗어나 옆 골목에 들어서니 꽤 많은 술집이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만석이라는 거. 사람이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몇 곳을 떠돌다 길을 건너 숙소 쪽 아케이드로 넘어갔다. 그쪽은 한산했고, 스시집을 들어갔다. 1층에 길게 바가 있고 바 앞엔 긴 수조가 있었다. 수조 뒤엔 젊은 남자 셰프와 고령의 서빙해 주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가게 이름을 물으니 스사키츠 寿し勝 였다! 후지즈카초 마르쉐 藤塚町マルシェ에서 소개 해줬던 바로 그! 인연을 하루 앞당겨 만난 반가움이란.
배는 부르고, 술은 한잔 더 하고 싶고, 맛난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먹고 싶은 심상으로 온 터라 많은 메뉴를 시키긴 어려웠다. 오마카세 1인이 가능한지 물었고 셰프는 행복하진 않은 표정으로 우릴 받아 줬다. 그렇게 수조 속 새우와 눈인사를 하며 3차를 시작했다. 따뜻한 니혼주, 해안가에서 잡아 숙성한 생선을 입에 넣는데 저녁을 안 먹고 온 줄 알았다. 이리도 맛나다니. 아니, 오염수 방류로 앞으로 이런 것을 먹을 수 없는 것인가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임은 마지막으로 새우를 시켰다. 앞에서 우릴 보고 있는 새우에겐 미안했지만. 그 맛은 달았다.
✓ 스사키츠 寿し勝 : google map
지도 목록 : 나오시마 여행기 1부, google map
도시 속 작은 도시, 을지로의 예술이야기를 전하는〈작은도시이야기〉 뉴스레터 ►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