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하나도 안 느껴집니다만
내 생일이었다. 길다면 긴 인생 중 가장 화려하게 생일파티를 했던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대학 시절이 아닌가 싶다. 서로의 생일에는 술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왁자지껄 놀고, 웃고, 디카로 못난 모습을 포착해서 싸이월드에 친절히 올려주던 그때는 생일이 정말 즐거웠다. 내 생일, 남의 생일 할 거 없이 언제나 축제인 기분이었다.
이제 나이 좀 먹고 보니 생일 축하받기도 왠지 민망한 기분이 든다. 생일이 뭐 대수라고. 축하까지 받을 일이니. 조용히 넘어가고 싶기만 하다. 어린 시절 못볼꼴 보이면서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던 친구들은 이제 카카오톡 쿠폰과 간단한 메시지로 근황과 축하의 마음을 전해준다. 동네 엄마들 몇몇도 스타벅스 쿠폰을 보내준다. 그냥 넘기려면 넘길 수도 있는데 애써 챙겨주는 마음이 고맙다.
남편도 내 생일은 항상 잊지 않고 미리 챙기는 스타일이다. 아니, 너무 일찍 챙겨서 허망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생일 몇 달 전에 백화점에서 값비싼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줘 놓고 "이거 너 올해 생일선물이야." 하는 식이다.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생일 선물이라는 명목하에 분에 넘치는 쇼핑을 가끔이라도 시켜주니 그 맛에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올해는 딱히 쇼핑도 하지 않았다. 물욕이 사라진 건 아닌데, 어설프게 재테크 책 몇 권 읽고 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 소비성 자산을 사들이는데만 몰두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되었다. 가방, 신발, 옷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는 못 되어도 노후에 자식에게 부담 주지 않는 정도의 자산 준비는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직접 어떤 투자를 실천한건 아니지만 일단은 절약이 최고의 재테크라는 생각에 백화점 출입을 자제하는 중이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남편은 또 나를 화나게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또 했다. 이번엔 예전만큼 그 정도가 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면서 하루 이틀 상당히 괴로웠다. "이 인간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를 무시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너무나 쉽게 아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놓고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모습에 더 짜증이 났다.
생일축하고 뭐고 꼴도 보기가 싫었다. 남자들의 사회생활이라는 핑계로 아내가 어느 정도까지 대체 이해해줘야 하는 건지, 내가 옹졸한 건지 의구심만 들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에게 남편욕을 한 바가지 하고도 분이 안 풀렸다.
내 눈치를 슬슬 보더니 어디론가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다. 남편이 들고 온 건 수제 빵집에서 주문한 레터링 케이크이었다. 평소에 이벤트나 깜짝 파티하고는 워낙 거리가 먼 사람이다. 뭘 준비했다거나 큰 걸 줄 일이 있으면 미리 다 말해버리는 스타일인데 나름 큰 마음먹고 준비한 것 같다.
케이크를 보면 단박에 내 기분이 풀리면서 "여보,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 너무 고마워." 할 줄 알았나 보다. 그래도 사 온 사람 성의를 봐서 무시하지는 않았다. 케이크를 열어보았다. 예쁘게 쓰인 글씨가 눈에 띈다.
꽃보다 예쁜 우리 와이프 생일 축하해요..?!
참나. 어이가 없다.
네가 이렇게 나를 속상하게 하고 상처 주면서 이딴 말이 지금 나오니?
이걸 진심이라고 믿으라고?
이렇게 아내를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나를 또 화나게 하니?
더 분노가 차오른다. 가만 잠시 더 생각해 보니 이 문구는 남편이 스스로 생각해 낸 게 아닐 수도 있다. 수제 케이크를 만드는 가게에서는 이렇게 정해진 문구가 분명 있을 것이다. 십중팔구 그중에 적당한 거 하나 골라서 한 게 틀림없다. 더 화가 난다. 이런 가식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그래도 아이는 예쁜 케이크를 보고 신나 하고 엄마 생일 축하한다고 사랑스럽게 안아준다. 그래, 애 앞에서 싸우는 모습, 툴툴거리는 모습은 보이지 말자. 문구를 직접 했건 안 했건 그래도 사온 정성이 있으니 내 넓은 마음으로 봐주는 거다..
남편은 생일인데 이제 그만 화 풀라면서 다음부턴 다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한다. 내 생일이면 누가 화나게 해도 화도 못 낸단 말인가? 애초에 화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어이가 없지만, 또 한두 달 지나면 흐지부지해져서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거 알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내가 참자. 나만 참으면 집안에 행복이 온다. 대신 친구들과, 또 브런치에 실컷 남편 뒷담화는 할 테다. 이렇게라도 해야 이 속 좁은 마음이 약간은 풀리는 기분이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