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 엄마에게 필요한 역량
우연한 계기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내가 20권 전권을 완독 하리라는 기대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학창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아주 일부분 지나치듯 배웠던 기억이 났고, 고전이 읽고 싶었다. 괴테니 니체니 하는 정통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책들은 내겐 너무 이해하기 어려웠고 과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읽고 싶기도 했다.
1권부터 나는 <토지>의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이 소설이 왜 그렇게나 유명했고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까지 한 건지 읽을수록 이해가 갔다. 물론 드라마로 만들어질 때에는 극적인 부분만 요약, 강조해서 시청자를 끌어들일만한 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어간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나라를 빼앗기기 전, 동학 운동으로 오백 년 전통의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계급사회에 불만이 슬슬 터져 나오던 구한말을 시작으로 해서 결국 나라가 독립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세월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솔직히 동학이나 제국주의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가 쏟아질 때는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더 많았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라고 느껴질 만큼 내 부족한 지식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구절도 넘쳐났고, 이 대단한 글을 쓴 작가에 대한 경외심만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20권을 완독 했어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좌절감도 들기는 하지만, 내가 <토지>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단순하다.
바로 우리말이, 우리 글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독서가는 아닐지라도 나름 책 좀 읽는다고 블로그에 리뷰도 남기고 틈만 나면 책 읽는 일상을 꾸린 지 몇 년째인데도 나는 그 많은 책을 읽으면서도 우리말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격을 갖춘 책을 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전에는 내가 그걸 느낄만한 소양이 없었는지, 아니면 그만큼 토지라는 소설이 강력해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는 <토지>를 읽는 내내 우리 글이 너무 아름답고 고와서, 이토록 다양하고 풍부한 색채를 가진 표현들에 압도당했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글에는 힘이 있다는 말을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본 것 같다.
박경리 선생님은 대체 어떤 분인지, 어떤 인생을 살다 가셨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힘이 넘쳐나는 생명력을 가진 글을 남기셨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심지어 왜 내가 국문과 전공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 헛웃음이 나올만하다.
<토지>를 처음 읽기 시작할 때 학기 초였고 아이의 학교 부적응으로 많이 괴로웠던 시기였다. 지금도 더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약물 추가 복용으로 약간 불안감만 누른 상태이다.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돌발 상황을 매 시간 각오하면서, 대안학교를 알아봐야 할지 소규모 학교로 가야만 하는 건지 풀지 못한 고민 속에 시간을 흘러 보내는 중이었다.
한 번씩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졌다. 남다른 아이를 키우면서도 잘 먹고 잘 자는 건 내 천성이라 우울증 약 없이 버틴다는 게 자랑 못할 자부심 중 하나였는데, 그 마지노선마저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음번 아이 정기 진료 때는 나도 같이 진료를 받아봐야 할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때 <토지>를 만난 건 나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이 땅, 내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이 겪었던 참상과 고통에 비하면 내게 주어진 현실에서 나도 모르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계급제도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운명으로 평생을 고통받고 생지옥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
하루 삼시 세끼 배불리 쌀밥 먹는 게 소원이었던 가난이 팔자였던 사람들,
동네에 불한당 같은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도 쉬쉬하고 뒤에서 남몰래 눈물 흘려야 했던 딸 가진 부모들,
양반 출신의 아버지가 살인자가 되어 하룻밤새어머니는 자살하고 동네에서 쫓겨나 살야만 했던 자식들,
부잣집 귀족집안에 시집갔지만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의 남편으로 인해 정신적 고문을 받으며 살아가는 교육받은 신여성,
관동대지진 때 조선사람들 대피를 도와주고 조선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배반당해야만 했던 일본인 등 삶이 불쌍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아니, 이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출신과 계급을 막론하고 인생에서 한 두 번은 운이 없으면 여러 번의 위기와 고난을 마주한다. 더욱이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에는 팔자를 떠나서 모두가 고통받아야만 했다. 정치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무시무시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비극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살아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박경리 선생님은 잊을만하면, 자주 그 말을 꺼내셨다.
살아있는 것 이상 소중한 것은 없다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그러니 치열하게 살아내야만 한다고.
삶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잊을만하면 건네주시는데, 지금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직접 해주시는 말 같아서 남다르게 와닿았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큰 약점인가.
절망에서의 탈출 뒤에 온 희열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찰나인가.
빼앗길 그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불안이 없다.
<박경리, 토지>
사람의 생이란 길어야 칠십이다. 그것은 순간과도 같다.
얼마나 소중한 삶이냐.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같은 것.
<박경리, 토지>
그러나 항상 불행한 사람은 없고 항상 행복한 사람도 없고..
남이 나보다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며 내가 남보다 항상 불행한 것도 아니며.
<박경리, 토지>
박경리 선생님은 나를 위해서 이 글을 쓰신 게 아닐까, 하는 커다란 착각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한 권 한 권도 굉장히 두께가 있는 편이라서 호흡도 길고 읽으려면 며칠은 걸렸다. 그럼에도 유튜브와 SNS 유혹을 이겨낼 정도로 이 책에 푹 빠져들어서 몇 달 동안 토지를 붙잡고 살았다.
글은 생명력이 있었고, 정말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앞에서 겸손해지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고 한참을 멍하니 한 페이지만 바라보게도 되었다.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 그 많은 인간군상 중에 나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누굴까.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의학적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상태는 아니다. <토지>로 우울증을 치료했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치료가 된 건지 알 길도 없다. 그렇지만 여느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자기 계발서보다도 백 배, 천 배는 더 나에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안겨주었다. 어느 처지에서도 꿋꿋이 견뎌내며 살아내라는 것. 운명 앞에 맞서지 말고 주어진 생을 묵묵히 살아내는 게 인생의 의미라는 걸 배웠다.
식자들에게 <토지>는 문학적, 정치적 의미도 많고 그와 관련해서 분석하고 논문까지 쓴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내가 느낀 것에 비하면 훨씬 더 멋지고 대단한 평론도 물론 넘쳐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무리 대작이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감상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한계지만.
그저 위로를 받았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고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도서관에서 한 두 권씩 빌려봤는데 언젠가 새 책으로 소장해 볼까 하는 목표도 생겼다.
일본 어딘가에 이름 모를 신식 폭탄이 떨어져서 독립을 맞이하면서 토지의 대단원은 막이 내렸다. 며칠 동안 허무함에 휩싸이고 있다. 이제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토지 등장인물들이 그 후에 이어질 삶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어떻게 견뎌야 한단 말인가.
그 후로도 이 책 저 책 헤매고 있는데 박경리 선생님의 글만큼 확 끌리지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집어든 책들이 하나같이 비극을 배경으로 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은 나치즘 정권을,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오월의 광주를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눈물 없이는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장면도 종종 나온다. 아마 이런 시대소설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나 보다.
읽다 보면 정말 이 소설 속 주인공보다는 내가 더 훨씬 더 나은 형편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는 결론이 쉽게 난다. 나라는 인간은 참 감동도 쉽게 받고 설득도 잘 당하는 편이라 더 이런 방식이 잘 먹히는지도 모르겠다.
남다른 아이를 키우느라 힘든 엄마들이 발달장애 관련 책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시대소설을 읽으면서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불과 한세기도되지 않은 시기에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불의와 불공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던 그들을 보며 한 줄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다 보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고통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생긴다. 때로 우리에겐 소설가의 상상에서 만들어낸 허구가 절실히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