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가 더 힘든가 게임
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으신 분과 한 사무실을 쓰다 보니 아무래도 대화를 자주 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거의 아이 또래의 자녀들을 키우는 엄마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20대 자식을 기르는(?) 부모 세대들과는 거의 교류할 일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 요즘 세상에는 20대 자식 키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 듯하다.
아니, 차라리 어린 자녀 키우는 게 더 쉬운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퇴직을 목전에 앞두고 계셔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고 버티기 쉽지 않지만 어찌 됐든 퇴직연한을 채우는 게 목표라고 하셨다. 결혼을 늦게 해서 약간 늦은 나이에 자녀를 둔 것도 있지만 20대인 자녀들이 아직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해서 데리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경제적으로 많이 부담된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군대 갔다 와서 복학 준비 중인데 다니던 대학 전공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고민 중이고, 공부 잘하고 야무졌던 딸은 이미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전공을 바꿔서 더 간판이 있는 대학으로 옮겨서 다니고 있다고 했다. 지방에 살다 보니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내는 것 자체도 많이 부담되는듯했다. 월세, 보증금, 학비는 그렇다 쳐도 생활비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두 분 다 공무원 직업이셨고 한 분은 퇴직하고 연금생활자라 그런지 대학생 둘을 키우는 게 버겁다는 말을 은연중에 자주 내비치신다.
휴학하고 전공 바꾸고 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힘드신 것 같았다. 얼른 학위를 따고 어디든 취업을 해서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스카이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든 세상인데, 아무렴 그 자녀들도 오죽할까 싶기는 했다. 어찌 보면 내키지 않는 전공을 계속하느니 기회가 될 때 전공도 바꾸고 다른 대학도 다녀보고 하는 것도 큰 기회로 삼을 수 있겠지만 퇴직을 앞둔 부모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휴학하고 집에 있다고 하더라도 돈이 안 드는 게 아니다. 데리고 있으면서 먹이고 옷 사입히고 용돈 챙겨주고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애들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사교육비 드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고, 대학 보내고 나면 한시름 놓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돈이 많이 들 줄 몰랐다고 하신다. 학원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분의 한탄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더군다나 다른 전문직 자격증 공부를 해보겠다고 휴학하고 집에 있는데 딱히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밤새 스마트폰이나 보고 게으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답답해 미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애한테 스트레스 줄까 봐 어릴 때처럼 혼내지도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 아들이 약간 우울증 증상처럼 외출도 잘 안 하고 은둔생활 비슷하게 하는 모습을 보이니 진지하게 상담이나 병원을 데리고 가볼까 고민 중이라고 하는 그 표정에는 내가 감히 예단하기 어려운 또 다른 삶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20대 자식들 키우는 게 훨씬 더 힘든가 싶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얼른 좀 커서 제앞가림 하고 나 좀 덜 신경 쓰게 했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했다. 그런데 자녀를 다 키운 성인이 되어서도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하면 부모로서는 더 괴로울 수 있겠다 싶다. 그 집 자녀들이 딱히 돈을 물 쓰듯 쓰는 것도 아니고 들어보니 나름 아르바이트도 하고 아껴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워낙 물가가 비싸기도 하고 취업 앞두고 여드름 치료한다고 피부과에 다니며 돈을 쏟아붓는데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하셨다.
그분뿐만 아니라 비슷한 나이대의 대학생 자녀를 키우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녹록지 않다. 잘 다니던 대학을 전공이 마음에 안 들고 적성에 안 맞다는 이유로 다시 수능 공부를 해보겠다는 자녀, 대학은 나왔지만 지방대라 취업도 잘 안되고 학력 향상을 하고 싶어서 인서울 대학원에 지원하겠다는 자녀 등 한숨만 나오는 사례들을 건네 듣게 되었다.
결국엔 다 돈이 결부된 문제였다. 성인이 된 자녀를 계속해서 부양하려면 대체 돈이 얼마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걸까.
문득 지금이 차라리 나은 건가 싶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라고는 센터치료비와 사교육비 그리고 먹이고 입히는 돈이니 대학 보내는 성인 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부담이 적을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아이 키우는데 적지 않은 돈을 쓴 건 분명하지만.
흔히 자식을 돈으로 키우면 안 된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경제적 지원 말고 부모로서 더 해줄 만한 것도 딱히 없다 싶다. 나이 들어가는 자식에게 필요한 건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기회와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부모가 아닐까. 내가 자랄 때는 그렇게 여유 있게 지원받지 못했지만 요즘 자라나는 젊은 세대는 우리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니까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내 아이가 20대가 되었을 때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 아이도 좋은 대학 가서 당당하게 바로 직업을 잡고 경제적으로 바로 독립할 수 있다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경제불황에 저성장시대라면 정규직 직장을 잡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가 아닌가. 앞으로는 더더욱 심해질 텐데.
자식 좀 크면 걱정 안 할 줄 알았더니 다 커서도 또 더 큰 걱정거리가 생긴다며 한숨을 쉬는 걸 보고 있자니 차라리 지금을 즐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지금 내가 하는 걱정은 미래에 하게 될 걱정의 크기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돈도 덜 들고, 걱정거리도 덜 심각한 때인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을 즐기자. 내일 걱정은 내일로 미루고 아이랑 그저 많이 웃으면서 지내는 게 행복을 챙기는 길이다. 나중 걱정은 또 그때 가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