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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잋 Feb 19. 2019

관계를 지키는 거절의 용기

거절 못하는 불치병, 이젠 고치셔야 합니다.

관계를 중시하다 보니 거절을 어려워하는 것이 저의 단점입니다.


이력서와 자소서 쓰기를 반복하던 이십 대 중반. 자기소개서에는 늘 장단점을 채워야 하는 항목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의 단점은 '거절을 못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해야 할 일을 미루다 마감 직전에 하는 편',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함'. 뭐 이런 단점보다는 '거절을 어려워한다'는 것이 신입사원으로 무난한 단점이 아닐까 생각해서였다. 물론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은 때때로 나를 힘들게 하는, 정말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했다.


거절을 어려워하는 성향은,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차를 마신다거나 열심히 준비한 과제를 공유해야 하는, 사소하지만 불편한 상황들을 반복적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 좁은 사람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혹은 관계가 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 돼!"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나보다 한참 높은 기수의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기수별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동아리 연락처에서만 보던 이름이었다. 어색한 인사를 짧게 주고받은 후, 선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증권회사에 근무 중인데, 동아리 동기와 후배들에게 계좌 개설 신청서를 받아 줄 수 있냐는 그런 부탁이었다. 난감했다. 백 번 양보해 내 개인정보야 탈탈 털어줄 수도 있지만, 지인들에게 신청서를 써달라고 부탁할 자신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인데... 이건 어려운 부탁이니까... 거절해도 돼!  


머릿속에 떠다니는 이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나는 또 '그놈의 오케이'를 하고야 말았다.

 "네에~ 제가 최대한 받아볼게요."

선배는 나의 수락을 무척이나 고마워했고, 생각보다 많은 양의 신청서를 들고 학교까지 찾아왔다. 나중에 맛있는 밥을 사겠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무거운 신청서를 나에게 넘기고, 선배는 참으로 가볍게 돌아섰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전화번호까지 기입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신청서. 내 몫을 채운 후 남은 수많은 신청서를 어찌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몇 지인에게 넌지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요즘 개인정보 문제에 얼마나 민감한데. 그 선배 너무하다, 야."


선배에게 신청서를 넘겨주기로 한 날, 나를 불쌍히 여긴 친구들의 신청서 몇 장을 추가해 무거운 마음으로 선배를 만나러 갔다. 반갑게 인사하던 선배는 건네준 신청서에 비해 한없이 얇아진 결과물을 보자 표정이 변했다.


 "개인정보를 기입해야 해서, 다들 안 쓰려고 하더라고요... 죄송해요..."


나의 사과에 선배는 못마땅한 말투로 "아니 그럼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지, 이제 와서 이거 언제 다 채우냐 내가..."라고 말했다. 부탁한 사람은 당당하고, 부탁을 들어주려 노력한 사람은 죄인이 되는 상황이라니!!!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부탁을 하고 되려 짜증을 내는 선배가 미웠지만, 이내 맘에 내키지도 않는 일을 덜컥 수락하고 책임지지 못한 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나와 선배는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가끔 행사가 있을 때 마주치기도 하지만, 선배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지 못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마주한다. 물론 나는 그 선배를 볼 때마다 '계좌 개설 신청서'가 떠오른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거절의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처음부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면 선배도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고, 둘 사이에 불편한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정쩡한 오케이가 오히려 관계를 망쳐버린 것이다.


"그래그래, 보자 보자!"를 남발하지만 정작 당일에는 약속을 펑크 내는 친구, "내일까지 완성해 드릴게요!"라고 자신 있게 말해놓곤 나 몰라라 하는 직장 후배를 떠올려보라. 이보다는 확실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고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사람이 훨씬 신뢰가 갈 것이다.


물론 무조건 "안 돼!"를 외치기보다는, 상대의 요청을 끝까지 경청하는 성의,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더해주면 거절은 더욱 부드러워진다.




요즘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타인에게 쏟는다. 아들·며느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어머님께 "예배는 동네 교회에서 드릴게요."라고 말씀드리고, 틈만 나면 보자 하는 친구에게는 "요즘 일이 많아서 오늘은 좀 쉬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 대신 여유가 있을 때 시댁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에너지가 충전되었을 때 친구와 넘치는 수다를 떤다.


내 마음이 편안해야 관계도 편안하게 유지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거절의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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