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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다 Nov 15. 2024

마흔 살의 장래희망

왕년에 뮤지컬 배우를 꿈꿨던 아줌마의 이야기

 남편과 아이와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갔다. 여자 어린이들에게 인기 많은, 마법과 공주의 조화가 아름다운 뮤지컬이다.

혼자 보내기엔 짧고, 아이와 함께라면 길고 긴 주말에 서울까지 가서 보고 오는 뮤지컬 공연이란, 반나절을 순식간에 지나가게 하는 마술이며, 아이에게 적절한 문화생활을 제공해 주는, 좋은 엄마이고 싶은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리 할로는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 큰 소리에 워낙 예민해서 공연장이나 축제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매일 저녁 드레스 잠옷과 마법봉, 어디서 하나 둘씩 받아 모아놓은 반지와 팔찌로 치장하고 나를 향해 마법 주문을 외치는 우리 할로공주님을 모시고 가려면 ’티니핑‘ 정도는 제시해야 합의가 가능하지 않겠나. 그렇게 우리 가족은 뮤지컬을 보러 갔다.


나도 어렸을 땐 내가 공주인 줄 알았지.   출처: 픽사베이


 소싯적,

 나는 문화생활을 즐길 줄 아는 아가씨였다.


 가방 안에는 늘 일본소설이나 산문집 같은 책 한 권을 넣고 다녔다. 나의 MP3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용량이 버거웠고, 취미란에는 당당하게 악기 연주를 적어냈다. 혼자 영화를 보는 일도 일주일에 서너 번, ‘영화의 이해’ 같은 교양과목을 일부러 수강하고, 고전영화와 비주류영화들을 찾아봤다. 미술전도 자주 다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이라 서양미술사 책을 읽고 정리하여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정성을 보였다.

 그때 좋아하지만 자주 하지 못했던 건 뮤지컬 관람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에게 몇 만 원씩 하는 뮤지컬 공연은 큰 결심이 필요한 사치였다. 그래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제목의 유명 뮤지컬 공연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돈을 아껴 보러 갔다. 그리고 뮤지컬을 보고 늦은 시간, 서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과 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의 서늘한 밤공기는 낭만이었고 그 벅찬 마음은 그날 밤 꿈에서 나를 뮤지컬의 주연배우로 변신시켜 주었다.


 이후로 참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러 왔다. 아이와 티니핑 공연장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무대를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훌쩍거리거나 손을 눈가로 가져가면 내 우는 모습을 남편과 아이에게 들킬 것 같아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흐르는 것들을 그냥 두었다. 그 눈물은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러 온 것에 대한 감격이 아니었다.

 




 열여덟 살쯤.


 학창 시절,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장래희망에 직업을 적어 내야 했다. 대체 왜. 한 사람의 장래를 직업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끔찍한 프레임에 희망이라는 단어까지 붙이는 게 어색하지 않나. 지금은 진로희망분야라고 하는 좀 더 적절한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커서 어떤 직업을 갖고 싶냐는 질문을 장래희망이 무어냐고 묻는 걸로 대신한다. 이 장래희망은 학생의 의견과 부모의 의견을 따로 적도록 나뉘어 있었는데 나는 부모님이 적어주시는 걸 똑같이 적곤 했다. 그 시절 나는 간절하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고 부모님이 원하시는 직업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 뜻 없이 따라 적어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직업이 없었다기보다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어쩌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을 수도.

 다만, 나는 내가 나중에 뭔가 하고 싶을 때 내 성적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원하는 직업이 더욱 애매해지고 아득해질 때에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대답 하진 못했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잘하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종이에 쭈욱 적고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직업이 무엇일까를 자주 고민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막연하게 나는 과학을 좋아하니까 자연과학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기로 했다.


교문 밖을 나서면 치마허리 단을 접어 올려 입기 바빴던 여고시절. 그때 난 참 싱그럽고 예뻤었지.   출처: 픽사베이


 스물두세 살쯤.


 아마도 헤드윅을 보고 왔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한 때 노래방에서 소찬휘나 김현정 정도는 탬버린 흔들어대며 안정적인 고음처리도 가벼웠거든. 수학여행이나 운동회 때 장기자랑하면 늘 센터에서 춤추고 그랬잖아. 하지만 다행인 건지 아쉬운 건지, 실제로 나에게는 그걸 실행할만한 뜨거운 용기와 열정이 없었고, 그 꿈은 금세 사라졌지만 그 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즐거운 추억이다.  

 나는 정말 화학을 사랑했고 화학 전공자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잇값을 해야 하고 더불어 돈도 벌어 밥값도 해야 하는 나이, 대학 4학년이 되고 나니 회사에 취직을 하든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한 후에 취직을 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큰 짐이 되어 나를 눌러내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나는 다시 학생이 되기로 선택했을지도. 여전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잘하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종이에 적었고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했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내가 적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집합체가 바로 인간의 심신을 이해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고 그것이 의학이다,라는 결론이 있었고 나는 의사가 되기 위해 다시 학생이 되었다.


길은 참 많다. 걷다 보면 막히기도, 합쳐지기도 한다.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다. 스무 살, 나에게 중요한 건, 어디를 향하느냐보다 일단 발을 떼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픽사베이


 스물여덟 살쯤.


 나의 장래희망은 의사가 되어 인류의 건강과 세계 의학발전에 힘을 쓰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진료실에서 열심히 환자를 보는, 의사 본연의 임무만을 완벽히 수행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끝없이 고민하고 직업과 통합시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었다.

 의사가 되고, 인턴수련을 마친 후 임신을 위해 잠시 쉬는 동안에도 나는 늘 다른 것들을 기웃거렸다. 뭔가 시작하기에 지금은 늦었다,라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가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이 의사로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책을 읽고,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타국에서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나는 늘 아이들이 좋고 미술을 좋아하니 진료에도 뭔가 이용할 수 있는 좋은 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동미술심리상담가 과정도 수강했다. 난생 처음 발레도 하고 줌바도 하면서 내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이리도 좋아했었는지 나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고, 잘하는 것들을 계속 잘하기 위해 유지하고, 하고 싶은 것들에 도전했다. 그렇게 나는 늘 설레고 기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을 꿈에도 즐거워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 늦어진 전공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라는 존재는 아내, 엄마, 딸, 며느리로서의 모든 역할과 충돌했다.

얼마나 많이 부딪혔을까. 나는 아팠다. 하고 싶은 것 많고 할 수 있는 게 많았던 나의 모습을 지키고 싶었던 의지에 멍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해내기도 버거웠다. 나에게 남은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 엄마, 딸, 며느리로서의 나,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한 생계수단으로써의 직업인 의사로서의 나뿐이었다.


조금 늙긴 했어도 아직도 난 스무 살 때와 비슷한 체격에, 노란 듯 하얀 얼굴, 웃으면 반달눈이 되는 것이 여전하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었다.   출처: 픽사베이


 이제 마흔 살.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뮤지컬을, 티니핑 뮤지컬을 보러 온 아줌마다. 이제 음악소리가 있으면 집중이 잘 안 된다. 영화관은 커녕 TV와 셋톱의 전원 코드는 좀처럼 꽂을 일이 없다. 가끔 피아노를 쳐볼까 하지만 쌓인 먼지만큼 맞지 않는 소리를 내는 피아노에게 괜히 미안해져 다시 뚜껑을 덮고 만다.

 좋아하는 일은 이제 그렇게 많지 않다. 예전에 무엇을 그리도 많이 좋아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고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지금 그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내 직업, 이 일뿐이다. 아, 그래서 학창 시절 장래희망에는 직업을 쓰라는 거였구나. 이만큼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일은 돈을 벌게 해주는 일과 동의어임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이 일도 잘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하고 싶은 일은 오늘 아무 일 없이 조용하게 업무를 마치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 좀 더 빠르게 육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해야 할 일들만 남았다. 아이를 늦게 않게 깨워서 등교시키고, 그 와중에 나의 출근 준비도 해야 한다. 집안일들을 해야 한다.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학원에 데려다줘야 한다. 요즘 환자들은 정말 많은 정보를 알고 오기 때문에 나도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공감하고 친절한 의사로서의 노련함을 익혀야 한다. 늘 뒷전인 남편에게 정작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미안함 뿐이지만 오늘은 남편에게도 다정함을 표현해 보자는 결심도 해야 한다.


 세상이 넓은 줄만 알았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틈이 너무 좁고 길구나.   출처: 픽사베이

 

 깔때기 같은 내 인생.


내가 발 디딜 수 있는 곳이 한없이 넓다고 생각했다. 넓은 입구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깔때기의 좁고 긴 목에 끼어있는 조난자다.


 그 언젠가 나는 뮤지컬 배우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 할 수 있는 것들을 종이에 적었었다. 그건 직업처럼 한 단어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었고, 이루었느냐 하는 결과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더 나은 나의 모습에 대한 고민, 그 가능성과 열망에 대한 설렘, 도전과 실패를 통해 단단해지는, 나를 담금질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장래희망은 그 과정 자체였다.


 티니핑 뮤지컬을 보러 가서 나는 울었다. 좋아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애처로웠다. 눈물을 닦지도 못했던 건, 아이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보다 꿈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러지 못하는 못난 엄마임이 창피하고 들키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나에게 다시 묻는다.


 너의 장래희망은 무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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