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들어 부쩍 이 단어를 많이 본 것 같다. 남미새. ‘남자한테 미친 새끼’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 탄생된 말인지 궁금해서 구글에 검색해보니 2020년에 작성된 글이 보였다. 내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2023년에 도착한 단어이지만 그 전부터 만들어졌고 쓰인 말인가 보다.
쓰인 맥락을 보니 남자를 너무나도 좋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피해를 주는 존재를 뜻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행동의 예는 다음과 같다. 모든 생활과 사고의 중심이 남자인 것.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안 궁금해하는 자신과 관련된 남자 얘기(‘썸남’, 연인, 남편, 아들, 덕질 대상 등등)를 계속 말하는 것. 교제 대상이 별로라 주변 사람이 말리는데, 주변인을 감정을 분출하는 용도로만 쓴 뒤 정작 안 좋은 연애는 꿋꿋이 지속하는 것. 남자를 안 만나고 있을 때도 티가 나는데, 예를 들면 연인이 없을 때만 연락이 잘 되는 것. 그러다 또 누군가가 생기면 두문불출하는 것 등등….
읽다 보니 상당히 찔렸다. 아무래도 나도 남미새였던 것 같은데?
- 남미새의 심리
그 사람은 왜 그 모양으로 살고 있을까? 개인의 특성도 이유가 되겠지만 사회적, 시대적 배경을 무시 못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20대였던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는 연애 지상주의자를 대량생산하는 시공간이었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 온통 사랑을 노래했고, 일상생활에서는 첫 만남에 연애 여부를 질문하는 게 당연했다. 대답이 ‘하지 않는다’이면 문제 있는 사람 취급하는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
물론 이런 시대에 내가 특히 취약했던 데에는 개별적인 특성도 있을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양육자의 방임, 그로 인한 마음의 구멍을, 커져갔던 애정 결핍과 인정 투쟁의 성향을 이제는 인지한다. 하지만 20대에는 그것을 언어화하지 못했고 막연히 마음의 구멍을 채울 수단만을 갈구했다. 그렇게 연애는 돈과 경험이 부족하고 취향은 빈곤했던 내가 상대적으로 쉽게 위안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선택한 수단이 됐다.
사실 연애 초기의 정신착란 상태는 꽤 재밌다.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게 만드는 호르몬 파티!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노르에피네프린의 대향연! 그것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중독 증세와 관련된 호르몬이다. 그때 나는 거의 연애 중독 상태였다. 나를 좋다고 하는 남자로부터 작은 장점만 발견해도 연애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남자가 알고 보니 형편없을 경우는, 불행히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남미새라면 단호하게 상대를 잘라내지 않지. 일단은 불행을 탐닉해야 한다. 밋밋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자신의 평범함과 초라함을 견디느니 자극적인 고민과 역동이 있는 불행을 택하는 것, 그것이 남미새다. 남미새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대체로 ‘환승’이다. 당연히도, 회피적이고 수동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며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라면 그 꼴을 보기까지 상당히 복장 터질 것이다. 당시 나를 지켜본 친구들도 얼마나 속 터졌을까? 역시 이 새는 해로운 새다.
이제는 제법 남미새의 사고방식과 욕망을 벗어던졌다고 생각한다. 서른이 지난 뒤 점점 그렇게 됐다. 아마도 서른 전의 초조함과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지위가 남미새의 증세를 강화한 것은 아닐까? 서른을 넘기자 오히려 초조함에서 벗어나 침착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2015년 한국 사회를 흔든 페미니즘 뉴웨이브도 사회구조와 스스로를 성찰하는 데 큰 자극을 줬다.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과 그로 인해 억압받는 개인을, 노동과 가사, 돌봄을 병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화와 구조를 깊이 생각했다. 온라인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와 일상생활에서조차 만연했던, 연애 중인 여성을 스스로 검열하고 억압하게 만들었던 언어에 깃든 혐오와 모순을 깨달았다. ‘그런 연애’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 약속했다. 조건 없는 정서적 지지를 경험하지 못해 평생 애정 결핍으로 허덕인 여자, 그를 남은 삶 동안 다독이며 아끼고 사랑해줄 사람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 미쳐도 해롭지 않은 대상에게 미치자
그런데… 남미새 졸업생인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현역? 내가 빠져 있는 이곳, 소셜 댄스라는 필드가 남미새와 여미새의 온상이라는 ‘머글’의 인식을 접하고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짝을 이뤄 음악에 맞춰 리드와 팔로우를 주고받는 춤이고, 대체로 짝이 남과 여로 구성되다 보니 그 속에 속하는 사람들이 짝 찾기에 미친 사람일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나 보다.
이런 인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셜 댄스 경력 20년 넘는 고인물 Y에게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춤판에 남미새 별로 없지 않아? 와봤자 얼마 못 버티고 다른 데 가지.”
부연 설명은 이랬다. 이 문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춤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제대로 즐기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춤 자체에 흥미와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시간과 노력이 아까울 거고, 더 손쉽고 자원 투자 없이 남미새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훨훨 날아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명 뒤 그가 덧붙인 말에 나는 크게 웃었다.
“오히려 여미새가 많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그렇듯 이곳도 미녀와 미남의 비율 차이가 크다.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성에 비해 잘생긴 남성을 찾기란… 아니 기준을 ‘훈훈한’ 남성으로 낮춰도 정말… 쉽지 않다. 그 점을 남성인 Y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괜찮은 여자’들이 모여 있고 자연스러운 신체 접촉의 기회가 많은 이곳이 여미새에게는 꽤 괜찮은 활동 무대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리고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내가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남미새나 여미새보다 ‘춤미새’가 많았다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에 미친 새끼라면 그 대상이 춤이었으면 좋겠다.
- 춤미새 1년
다행히 2023년은 춤미새로서 여한 없는 해였다. 살사와 바차타를 새로 배우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며 해당 춤의 기량이 빠르게 향상되는 경험을, 함께 공연하고 응원해준 사람들과의 끈끈한 동료애와 후련한 성취감을 만끽했다.
또한 영화를 매개로 평소 생각해온 가치를 시험해보기도 했다. 춤 관련 영화를 보고 춤을 추는 행사 '홈춤영'(a.k.a 무비포둠칫)이 그것이다. 소셜 댄스에 대해 얕을지언정 넓게 체험하며 입문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한 초보 워크숍이 폭넓고 다양하게 생기면 좋겠다는 평소 바람을 실현해 볼 기회였다.
상영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새로운 춤 왁킹도 체험해봤는데 신선하게 즐거웠다. 2023년은 내게 결핍을 느낄 틈이 좀처럼 없던, 충만한 시간이었다.
춤미새로서, 춤추는 사람을 볼 때 망막에 씌워지는 남미새/여미새라는 필터가 거북하다. 춤 자체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지워버리는 지나치게 이성애 중심의 사고방식 같아서.
무엇보다 이성은 건강하게 관계 맺기 위해서는 미치면 안 될 대상 같다. 심리학을 기반에 둘 때 더 안정적이고 성숙한 관계를 위해서는 연애 초기의 각성 호르몬이 잦아든 뒤 찾아오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안정을 느끼게 하는 옥시토신의 시간이며, 상호 간의 존중, 의리, 돌봄 같은 미덕이 강조되는 때이다. 상대가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인간임을 주지하고 경청하며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를 맺고자 지속적으로 (때론 지난하게) 노력하는 일은, ‘미친 상태’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물론 춤에는 미쳐도 된다고 생각한다! 춤에 미치면 (새벽 뒤풀이만 안 한다면) 건강해지고 (주 3회 이상을 춰야 하겠지만) 체중도 감량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즐거우므로. 2023년이 아쉬웠다면, 2024년 일상에 새로운 활력과 윤기를 더하고 싶다면 춤의 세계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