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Liar'가 인종차별적이라고?
일본 상점에서 일 할 때엔 오전 근무조(Frühschicht)와 오후 근무조(Spätschicht)로 나뉘었다.
9시간 시프트는 '8시간 근무+1시간 휴게시간'으로 짜여졌다.
매일 아침 벽에 붙는 당일 근무표에 따라, 하루에 근무하는 20여명 남짓의 직원중 오직 3-4명 정도만이 그날의 휴식 메이트로 정해졌다.
오늘은 누구랑 밥을 먹게될까, 그 기대감이 마치 반배정표를 보는 설레임과 비슷했다.
그날은 오전조인 슈퍼바이저 H, 시니어 B와 함께 배정된 날이었다. 두 독일인과의 점심시간 당첨이었다.
- H는 부모님이 베트남에서 오신 베트남계 독일인으로, 베를린에서 나고자란 찐 베를리너다. 그의 원래 메인 잡은 댄서다. 배틀에 주로 나가는 배틀 댄서.
그와 일한 첫 날, 그가 강한 베를린 악센트로 손님과 20분여간의 치열한 토론을 펼치는걸 보고. 그리고 그 끝에 반드시 승리하는걸 보고 몇개월은 그를 피해다녔다.
저 사람은 필시 배틀러다. 내 인생에서도 토론은 빠트릴 수 없는 키워드였다지만, 승부를 차치하고 무엇보다 저 베를린 슬랭을 알아들을 자신이 없었다. 엮이기엔 위험하다. 그가 저 멀리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다가올 때면 자연스럽게 몇 걸음 물러나 'Hallo~' 하고 바쁜 척 하며 달아났다.
- B는 부모님이 터키에서 오신 터키계 독일인이었다.
서울에서 교환학생을 한 1년의 시간과 5년 넘게 만난 한국인 남자친구를 둔 덕에/탓에 B는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나 입이 심심해'라고 말하며 과자를 집어먹을때엔, 넌 도대체 그런 말을 어디서 배운거냐고 감탄했다. B는 들깨 칼국수와 간장게장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다.
마음은 다정했지만 모호함엔 다정하지않은 B였다.
독일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우리의 대화속에서, 핀트가 맞지 않다거나 옳은 단어인지 모르겠을때엔 다음으로 넘어가지않고 꼭 붙잡아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마음으로 말한거야?'
B와 나는 언어를 떠나 항상 그런 지점에서 만났다. 서로 닮아있었다.
1년 남짓 함께 일한 시간은 언어의 장벽보다 두터웠다.
점점 이곳은 내게 유치원과 비슷해져갔다. 나는 떳떳한 외국인 신분으로서 H와 B를 귀찮게 굴었다.
어디서 배워온 이상한 독일어를 툭툭 꺼냈다. 한국어로는 말이 되는 문장을 독일어로 셀프번역해보고 이게 맞는지 컨펌해달라며 졸랐다. 대학교 수업중 배운 말도안되게 학문적인 단어들을 뜬금없는 문장에 섞어 써봤다.
내 멋대로 조합한 단어가 어떻게 들리는지 자꾸 갓 말 배운 아이처럼 질문하며 그들의 귀를 괴롭혔다. 그 시기는 내 안의 독일어 세계를 확장해나가던 유아기와 같았다.
인생도 춤 추듯 사는 H는 내 독일어가 점점 흥미로워진다(interessant!)고 깔깔 웃었다. 난 그 앞에서 '영광의 상처'를독일어로 말하는 걸 좋아했다. 그 단어를 말하는 나를 제일 웃겨하는 H였다. 둘만의 쎄쎄쎄 같은거였다.
나와 같은 언어를 3개나 공유한 B는 어디 한번 해봐 라는 표정으로 잘 들어주다가도 입꼬리를 씩 웃으며 '너 방금 관사 빼먹었다'며, 말은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H와 B와 나의 점심시간.
함께 휴게실에 모여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다 까먹었을때엔 시간이 40분이나 남았다.
우리는 심심했다.
H와 나는 그날도 옥신각신 하던 참이였다. 휴게실에 놓여있는 과자 성분표를 살펴보며, 이게 좋니 나쁘니 했다. 지루해지면, 그 다음엔 감기에 걸리면 뭐부터 해야하느니 병원을 가니 그냥 차를 마시니. 어쩌구 저쩌구 의미없는 논쟁을 이어나갔다. 그게 우리의 유희였다.
그러다 (왜 그랬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능청을 떠는 H를 보며 '너는 화이트 라이어야!'라고 말했다.
영어 능통자인 H는 그게 도대체 무슨 단어냐고 했다. 그제서야 H얼굴에 흥미로움이 번져나갔다.
아 맞다 얘 배틀러지.
"White Liar 몰라? 하얀 거짓말. 착한 거짓말 하는 사람! 독일엔 그런 단어 없어?"
나와 H는 서로의 말이 이해가 안가는 순간마다, 독일어 모국어-한국어 능통자인 B를 쳐다봤다.
통역하란 뜻이었다. 화이트 라이어라는 단어를 들은 H는 바로 B에게 고개를 돌렸다. 통역해.
틱톡을 넘겨보던 B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너희 둘이 온종일 토론거리를 찾아헤매더니 이제서야 뭐 하나 발견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B는 H에게 독일어로 'Harmlose Lüge(무해한 거짓말)'와 같은 말이라고 설명했다. H는 다시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착한건데. 좋은건데. 근데 왜 White야? 그거 인종차별적인 표현 아냐?"
"아니 뭔 소리야. 그게 어떻게.."
아니 근데 그러고보니 그랬다. 왜 white지?
물론 하얀것 중 무해하고 좋은건 많다. 눈. 우유. 계란 흰자. 눈. 음, 그리고 눈.
하얀 거짓말이란 말이 어디서 왔지. 한국어엔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이 있다. 그러니 하얀 거짓말이란건 분명 영어적 표현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그게 한국어가 아니라면, 그렇기에 그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두고 보자면. 그리고 이민의 역사와 인종적 질문을 품에 안고살아왔을 H의 배경을 생각해보자면 그의 질문도 너무나 합당한 지위를 얻었다.
10년 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2024년의 바로 이 휴게실에선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야 할 단어일 수 있겠다.
누가 하얗다는 말로 거짓말 해왔을지도 모른다. 네가 맞네. 나 이 독일어 유치원 참 맘에 들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1시간이란 휴게시간 안에 기어이 토론주제로서 만족할만한 Punkte(지점들)을 찾았음에 만족하며 일터로 돌아갔다.
지나고보니 거짓말같은 그 날의 무해함이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