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2살 무렵, 나는 꽤나 총명하다 여겨졌다.
5살 터울의 언니를 둔 덕인지 나는 스스로가 딱 그만큼 앞서있다고 자부했다. (당연히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제법 어른같은 말장난을 쳤다. 과학 영재 대회라던지 그림 그리기 대회라던지 별별 대회를 다 나갔다. 반이건, 학교건, 뭘 대표 할 수 있는 자격이 아무런 노력없이 저절로 쥐어졌다. 시절이 그리했듯, 게으른 담임 선생님 대신 방과후에 남아 반 친구들의 생활기록부를 대신 적기도 했다. 온 세상이 내게 똘똘한 아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줬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 동시에 두 가지 대회를 맡았다.
하나는 옆반 친구와 듀오로 나가는 영어 말하기 대회였다. 다른 하나는 학급 다같이 나가는 합창대회였다.
영어를 학교의 대표가 될만큼 구사했느냐, 라고 묻는다면 알파벳도 간신히 읽던 때였다고 이제와선 고백할 수 있다. 그냥 선생님들끼리 일을 저리 미루고 이리 미루다, 선발 과정을 어떻게든 줄이고자 학교의 총명 딱지가 붙은 애 두명을 뽑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대회까지는 한 달의 시간이 주어졌고 얼떨결에 영어짱이 된 나와 옆반 애는 일단 선생님이 써준 영어 스크립트 밑으로 모든 발음을 적어내렸다. 그리고 달달 외우는게 전략이었다. 듀오라고 말하기도 민망할만큼 호흡이랄건 없었으며 주어진 라인들을 그저 각자의 암기력에 맡기기로 했다.
합창대회는, 객관적으로 돌이켜봐도 다른 반에 비해 유달리 우리반 소리가 곱긴 고왔다. 그런 목소리는 아주 우연하게 모이기도 한다. 더군다나 합창대회를 진두지휘하는 담임 선생님이 똘끼가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노래에 더할 기가막힌 율동을 만들어냈다.
그때 부르게 된 노래가 '멋쟁이 토마토'다. 왜 하필 멋쟁이 토마토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건, 그 시절엔 다같이 교실 모니터로 플래시 영상을 틀어놓고(플래시라는 말이 아직도 있을까?) 노래를 신나게 따라부르는게 수업이 끝난 후 보상이었다. 가장 인기있었던 곡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으로 시작하는 야인시대 노래였으나, 그 노래를 시 대회에서 부르기엔 너무 야만적이었음으로 공동의 두번째 최애곡인 멋쟁이 토마토로 정했던 기억이 살풋 난다.
두 대회는 같은 날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쪼끄만게 어쩌다 일찍 값보다 더 받는 삶을 산 탓에, 욕심 덩어리였다.
두 대회 다 휩쓸고 싶었다. 기고만장했다. 그래서 무엇하나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래서 오전에 영어 말하기 대회를 나가고, 중간에 엄마가 차로 데리러오면 도시의 반대편에서 오후에 열릴 합창대회장으로 가기로 했다.
개인으로서의 멋짐과 팀으로서의 활약을 동시에 보여주는 여름을 보내겠어! 그런 꿈을 꾸던 때다. 엄마는 한동안은 그 시절 나의 패기를, '요 녀석이 얼마나 떡잎부터 달랐는지' 설명 할 때 증거로 썼다. 그 날의 내 마음은 알았을까.
먼저 도착한 영어 말하기 대회장 대기실엔 작은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 단위의 대회라 그런지 지역 채널에 생중계 된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다른 초등학생 듀오들의 멋들어진 스피칭을 들으며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떨렸다. 경험해본 적 없는 긴장이었다. 대기실의 풍경과 그 감정 이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우리 순서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함께 참가한 내 짝꿍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이제 내 차례였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말을 배워본 적 없는 수생식물이 된 감각이었다.
느껴지던건 발 밑에 무언가가 날 받치고 있다는 느낌과 얼어버린 나를 대신하여 안절부절하는 지도 선생님의 눈 뿐이었다. 영어를 말 할 줄 알았던게 아니라, 외울 줄 알았던 탓에. 그런 종류의 긴장이 거는 오블리비아테(기억 지우기 주문)를 그 오만한 어린 애는 경험해 본 적 없었던 탓에. 나는 그냥 그러고 말을 잃은 채 서있었다. 영겁이었다.
어떻게 됐느냐 하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아이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레테의 강으로 몸을 던졌다.
영혼을 잃고 엄마의 차에 실려 다음 정거장으로 이동했다. 애는 지금 헝겁인형인데 그와중에 시뻘건 단체복으로 갈아입고 '나는 춤을 출거라고', '나는 멋쟁이'라고 노래를 부르라는데. 부를 수 있었을까.
근데 불렀다. 근데 춤 췄다. 심지어 잘 부르고 잘 췄다. 옆에 애도 추니까. 목소리가 들리니까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 학급은 우수상을 차지했다. 최우수상만이 전국 대회에 진출할 자격이 주어졌기에 우리의 토마토 여정은 거기서 막을 내렸지만. 방울 토마토 35명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으나, 나는 그저 속으로 울면서 춤추던 도마도였다.
개인으로 패배하고 팀으로 승리하던 날. 그 날의 기억은 영영 내 자아에 아로새겨졌다.
나의 '멋장이 도마도' 세계관은 그 날로부터 탄생했다.
성격을 나타내는 '쟁이' 보다는 한땀한땀 만들어내는 수공업자라는 의미의 '장이'가 맘에 들었고, '토마토'는 날 좌절시켰던 영어니까 '도마도'로 대체하기로 했다. 그게 그날의 나와 더 잘 어울렸다. 그게 내가 여전히 브런치, 블로그, 유튜브, 롤 아이디 등 각종 닉네임을 정해야 할 때 가장 먼저 도마도로 정하는 이유이다. 친한 친구들은 가끔 '야 도마도' 하고 부른다.
괴로운 의미라거나 어떤 상징성을 위해 만든 세계관은 아니고, 이제와서는 웃기다. 웃음으로 눈물닦기 같은 것인데. 나 뭐 없네, 나 그냥 울면서 다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도마도네.
그게 인생 같았다.
그 영어 말하기 대회 이후, 나는 일본어 노래 부르기 대회는 나가도, 영어에 '영' 자 대회는 모조리 피해다닐만큼 그 날의 고통을 안고 살기도했다. 한동안은 누가 날 높이 사면 손사레를 쳤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오해예요. 감상에 젖을 틈 없이 오만한 총명의 갑옷이 벗겨져버린 도마도 21번.
근데 그렇게도 살 수 있다. 아무리 꾸며내고, 꾸며냈단걸 눈치채지더라도. 그래도 그냥 내가 내 스스로 '멋장이다', '도마도다', '우린 멋장이 도마도 군단이다' 하면 그냥 그런거다. 그걸 나 또한 자꾸 잊어 스스로를 괴롭히지만, 내 DNA 어딘가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면서 춤 출 수 있는 도마도의 영혼이 일몰처럼 발갛게 자리잡고 있으리란 믿음으로.
어린 날의 트라우마란 한 인생을 휘둘만큼 매섭기도 하기에, 나 또한 영영. 정말 영영 외국어로 '말'하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 도마도가 8000km를 건너와 여기서 영어로도 말하고 독일어로도 말하고 있다. 뭘 내가 대단히 뛰어나거나 잘한다는 말이 아니다. 엄청난 의지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는 서사도 없다.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며 그 날의 트라우마가 증폭됐던 날이 훨씬 많지만 그 날의 이야기는 다른 날 적기로 한다.)
요는, 언제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저 지하 800층 쯤에라도 주렁주렁 열려 있을지 모른다는 것.
아침엔 영겁의 방에 갇혀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뻥끗 못해도, 저녁엔 길 잃은 도마도들끼리 모여 춤을 출 수도 있는거다. 모른다는거다. 하루를 끝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하루가 패배일지 승리일지 감히 무슨 수로 아냐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고 일단 도마도. 멋장이 도마도. 내가 내게 여전히 그리 이름 붙이는 까닭이다.
나라는 도마도와 혹시 혼자 얼어붙어 춤 추는 법을 잊었을 어떤 도마도를 위해. 그래서 적는 글일 뿐이다.
그 무대에 너만 갇힌 것은 아니었다고. 우리 전국구는 못해도 같이 추면 우수상 정도는 노려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사실 상 같은거 없어도 우리 괜찮은거 아니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