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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를 향한 자유, 아도르노 철학의 반짝이는 역설

미적 자유와 실천의 긴장 속에서 새로움을 꿈꾸는 과정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I. 들어가며: 자유 개념을 뒤집어 보는 모험

- 기존 자유론을 넘어서는 아도르노의 ‘객체를 향한 자유’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자유를 떠올릴 때, “자유로운 의지로 내 삶을 직접 결정한다”라는 이미지를 품곤 합니다. 이는 고전적 근대 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자율로서의 자유’ 관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본 논문은 이런 익숙한 자유 개념과 달리, 오히려 “객체를 향한 자유(Freiheit zum Objekt)” - 『미학강의Ⅰ』, p.63/46라고 불리는 독특한 시각을 펼쳐 보입니다.
저자는 “자유가 곧 자기 지배가 되어 버리는 역설”을 지적하면서, [“자유라는 계기의 자기 경험은 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 그러나 의식 내지 이성적 통찰은 단순히 자유로운 행위와 동일하지 않으며, 의지와 온전하게 동일시할 수도 없다.” - 『부정 변증법』(이하 ND), p.314/226]라고 말합니다. 즉 기존 자유론은 자칫 자연(감성)과 정신(이성) 간의 위계를 고착화한다는 것이죠.
그와 달리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체를 향한 자유”는 “객체와 부딪히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흔들리고, 결국엔 자기 지배를 벗어나는” 역동적인 자유입니다. 이때 객체는 우리의 감각(내적 자연), 외부 자연(외적 자연), 심지어 제도나 타인 등 “주체가 온전히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타자적 세계” 전부를 포괄합니다.


II. 지배와 해방: 근대 독일 철학 전통과 아도르노

- 칸트, 실러, 헤겔의 틀을 계승하면서도 탈중심화를 노리는 전략


저자는 먼저 칸트, 실러, 헤겔을 관통하는 “이성과 자연, 주체와 감성” 사이의 분열에 주목합니다.
칸트는 자유를 “자율로서의 자유”로 규정했고, 여기에는 [“모든 존재자, 모든 자연으로부터의 절대적 독립성” - 아도르노(2019), p.190]이라는 관념이 전제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성과 감성을 이분화하면, 결국 주체가 자기 자신까지 지배하는 기형적 구조를 낳는다고 비판합니다.
이에 비해 실러가 칸트적 분열을 “미적 조화” 개념으로 극복해 보려 했으나, 헤겔 눈에는 그 시도가 관념적 이상주의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헤겔은 “외화(Entäußerung)를 통해 인간이 해방된다”고 보았지만, 아도르노는 여기에도 여전히 [“정신과 자연의 위계가 잔존하는 지배적 동일성” - ND, p.308/221-222]이 녹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자는 칸트-실러-헤겔의 문제의식을 모두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주체 중심성” 자체를 깨뜨려야만 지배의 문제를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유와 지배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 틈새를 파고들 방법이 바로 “객체를 향한 자유”라는 것이죠.


III. 자유의 중심 계기: ‘스스로 내맡김’이라는 능동적 수동성

- 주체를 내려놓을 때 오히려 획득되는 자신


객체를 향한 자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자신을 대상 속으로 사라지도록 내어주되(sich erlöschen), 다시금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되찾는 역설적 경험”입니다. 아도르노는 [“한 작품을 보거나 듣거나 읽은 주체는 완전한 처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자신을 망각하고 [...] 작품 속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sich erlöschen).” - 『미학 이론』(이하 ÄT), p.37/33]라고도 말합니다.
즉 기존에는 ‘내가 무엇을 의도하며 행위해야만 자유를 실감’한다고 여겼다면, 아도르노는 반대로 [“비자의적인 것 속에서의 자의성이 예술의 생명소이다.” - ÄT, p.185/174]라고 말합니다. “내가 목적을 세워 관철하기보다, 대상을 그 자체로서 존중해 주어야” 그 대상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능동적 수동성(aktive Passivität)” - ÄT, p.287/190]이 필요합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집중하여 대상이 가진 질적 특징을 좇되, 그 과정에서 나의 ‘욕구나 집착’을 유보하는 태도가 바로 ‘객체를 향한 자유’의 정수라는 겁니다.


IV. 충동(Impuls)과 미적-인간학적 힘(Kraft)

- 이성보다 앞서며, 동시에 이성과 불가분인 창조의 원동력


그렇다면 이런 미적 참여는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저자는 그 원천으로 “충동(Impuls)”을 지목합니다.
[“개념적으로 명료해지지 않는 잉여, 어떤 충동의 계기가 없다면, 아무 행위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아도르노(2019), p.180-181]라고 밝히면서, 바로 이 충동이야말로 ‘주체가 놓치기 쉬운 미메시스적 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충동은 [“사유가 그 자체로, 자기 고유의 형상에 따라, 그 자신 사유 아닌 것에 결부되어 있지 않다면, 활동으로서 사유의 객관성도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 “Anmerkungen zum philosophischen Denken”(이하 ApD), GS 10.2: 601]라는 문장에서도 암시되듯, 이성 이전적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맹목적이고 비규정적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향해 감응하는 순응(미메시스)의 힘”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충동은 의식적 주체가 세운 규범과 목적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역으로 그런 기존 질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창조적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V. 미적 자유의 비실천성, 그리고 실천성

- 직접적인 결과를 낳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해방적


문제는 충동의 맹목성 때문에, 실천적 주체 입장에서는 “비생산적이고 방해적”이라고 비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능동적인 것의 핵심 안에는 수동성이 숨겨져 있다.” - ApD, GS 10.2: 601]라는 표현처럼, 충동은 우리의 이성적 통제가 닿지 않는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지배적 실천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합니다. [“동물적 진지함의 실천에서 해방된다면, 이는 유희를 통해 가능해진다.” - “Marginalien zu Theorie und Praxis”(이하 MTP), GS 10.2: 763]라는 구절처럼, 미적 자유는 자기보존이나 목적 달성 논리에 매이지 않는 “유희”이기에 오히려 지배 질서를 뒤흔드는 잠재력을 가집니다.
동시에, “충동이 없는 의식적 실천” 또한 기계적 반복이나 관료적 형식으로 굳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인식은 결실을 맺으려면, 돌려받을 기대 없이(á fond perdu) 대상들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한다.” - ND, p.90/43]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언가 성공과 유용성만을 따지면 제대로 된 변화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VI. 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

- 지배를 넘어서려면, 자연스레 ‘객체’를 향한 태도가 열쇠


이처럼 미적 자유가 실천과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실천을 갱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궁극적으로 “지배를 비판하고 해방을 모색한다”는 아도르노의 사회철학적 목표를 가리킵니다.
그가 [“칸트에게 자명했던 근세적 의미의 개인이 형성되기 전에 [...] ‘자유’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 ND, p.303-304/218]이라고 말하듯, 근대 이후의 우리는 ‘자율’이라는 틀에 빠져 타자·자연 지배 논리를 쉽게 절대화했습니다. 그 결과 “주체가 자기 자신까지 지배하는 부자유”가 탄생하기도 했죠.
반면 [“자유와 결정론의 모순은 때로는 자유롭고 때로는 부자유로운 주체들의 자기경험의 모순이다.” - ND, p.394/294]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가 본질적으로 ‘모순 속에서 흔들리는 실천의 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모순에 균열을 내는 계기로 “비실천적이지만 해방적인” 미적 자유의 충동을 강조합니다.


VII. 부정성을 껴안는 자유: 늘 열려 있고, 늘 위태롭습니다

- “자기 상실을 통한 자기 획득”은 영원히 보장되지 않습니다


흔히 “자기 상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고 요약되는 아도르노의 자유론은, 그 ‘자기 획득’이 보장되거나 자동화되지 않는다는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던져졌지만 돌아오지 못할’ 위험이 늘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불안정함이 곧 부정성의 힘이며, [“자유가 곧 안정적 상태가 아니라, 부단히 스스로를 질문하고 부정하는 과정” - ND, p.84/38]임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객체를 향한 자유”는 결코 감미로운 완성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 질서와 자신을 해체·재편하는 불확실성 속에서, “현실 속에서 부단히 산출해야 할 해방적 활력”을 보여 줍니다.


VIII. 맺으며: 지배 비판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

- 미적 차원의 유희가 없다면 진정한 실천도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객체를 향한 자유”는 탈주체적이고 비생산적인 ‘충동’을 통해, 기존의 지배 논리에 균열을 내는 미적 해방 개념입니다. 이는 칸트와 헤겔 전통의 ‘이성적 자유론’을 넘어서는 동시에, 그 ‘해방’ 테제를 적극적으로 변주하고 확장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도르노에게 사회란 타자에게 편안히 안길 수 없는, 각자도생적이고 경쟁적인 장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자신의 집에서도 집처럼 편하지 않은 것” - 『미니마 모랄리아』(이하 MM), p.60/41]이 윤리적 태도가 된다는 말은, 끊임없이 우리가 ‘낯선 타자성’을 마주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자유론은 “객체와 친화성을 맺어 보는” 모험의 가치를 제시합니다. 우리의 철저한 자기보존 욕구와 타자·자연 지배의 논리를 잠시 내려놓는 순간, ‘전혀 다른’ 자유가 열릴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상(실천)은 사태의 경험으로부터 부단히 갱신” - ApD, GS 10.2: 604]된다는 아도르노의 통찰과 맞물려, “지배적 현실을 전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 글은 [정진범, ""객체를 향한 자유(Freiheit zum Objekt)" - 아도르노의 자유론과 실천의 문제" 철학 158 pp.117-148. (2024), KCI 우수등재]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


[독자의 평가와 일독을 권하는 이유]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체를 향한 자유’는 우리의 일상적인 ‘주체적, 이성적, 목표 지향적’ 자유관에 반기를 듭니다. 이 색다른 관점은 철학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며, “자유와 부자유가 어떻게 뒤얽혀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선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논문은 전통적인 자유 개념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감성적이고 미적이며 인간학적인 새로운 계기를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충동’이라는 어두운 힘이 어떻게 실천을 갱신하고, 사회적 지배를 비판하며, 참된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합니다. 기존의 지배 논리나 정치철학에서 쉽게 다루기 어려운 지점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아도르노 철학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자기성찰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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