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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가? 87체제와 승인규칙

H.L.A. 하트의 법철학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법적 변화 읽기

(본 글은 인문학 전문학술 논문의 내용을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학문적 정확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부 내용이 원문의 의도나 철학적 해석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원문 및 관련 전문가의 저작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I. 우리 안의 87년 체제: 민주화와 법의 변화

-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핵심 변화, 특히 헌법재판 활성화와 기본권 실효성 확보 조명하기


우리는 지금 ‘87년 체제’ 안에 살고 있습니다. 1987년에 개정된 헌법 아래에서, 또는 그 위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법 등 다양한 영역의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87년 체제는 이전 시대와 무엇이 다를까요?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바로 ‘민주화’입니다. 건국 이후 독재와 권위주의로 점철되었던 한국 헌정사는 1987년 개헌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87년 헌법은 민주화 열망의 규범적 결실이자, 이후 민주적 헌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와 평화적 정권교체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 큰 변화입니다. 하지만 법적인 차원, 즉 헌정의 규범적 차원에서 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헌법재판의 활성화헌법상 기본권 조항들의 실효성 확보입니다. 오랫동안 유명무실했던 헌법재판 제도가 활발히 작동하기 시작했고, 과거에는 장식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국민의 기본권들이 “살아서 제 목소리를 내고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입법자들은 법을 만들 때 헌법상 기본권 침해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되었고, 법관들도 법률의 위헌성을 살피게 되었으며, 일반 시민들조차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될 경우 법적으로 다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헌법재판의 일상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획기적인 87년 체제의 법적 변화를 어떻게 법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재판이 활성화되었다’, ‘규범이 실효성을 얻었다’거나 정치적 ‘민주화’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을 넘어, 법 자체에 초점을 맞춰 이 변화의 깊이를 담아낼 이론적 틀은 없을까요? 본 논문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미 법철학의 거장 H.L.A. 하트(H.L.A. Hart, 1907-1992)의 승인규칙(rule of recognition) 이론을 유력한 후보로 제시합니다. 87년 체제의 변화를 ‘대한민국의 승인규칙이 바뀌었다’, 즉 “무엇이 법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할 수 있는지 탐구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입니다.


II. 법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H.L.A. 하트와 승인규칙

- 법을 '규칙의 체계'로 이해하기: 일차 규칙, 이차 규칙, 그리고 법체계의 토대인 '승인규칙' 분석


H.L.A. 하트는 법을 단순히 ‘주권자의 명령’으로 보았던 이전의 법실증주의(대표적으로 존 오스틴)를 비판하며 법을 규칙(rule)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오스틴처럼 법을 처벌의 위협을 동반한 명령으로만 보면, 법은 강도의 요구와 다를 바 없고, 입법자가 바뀌는 상황이나 법이 개인의 기회를 실현하는 측면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하트는 법명령설의 가장 큰 결함이 “핵심적인 입법절차를 규율하는 근원적이고 수용된 규칙들”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며, 명령이 아닌 이 규칙의 관념이야말로 “법리학의 열쇠”라고 강조했습니다.


하트는 그의 대표 저서 『법의 개념(The Concept of Law)』에서 이러한 생각을 체계화했습니다. 그는 법체계를 다양한 종류의 규칙들이 결합된 시스템으로 설명합니다. 사회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말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일차적 규칙들(primary rules)’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차적 규칙만으로는 사회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어떤 규칙이 진짜 따라야 할 규칙인지 불확실하고(불확실성의 문제), 사회 변화에 맞춰 규칙을 바꾸기 어려우며(정태성의 문제), 규칙 위반 시 분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비효율성의 문제).


이러한 문제들은 ‘이차적 규칙들(secondary rules)’의 도입으로 해결됩니다. 이차적 규칙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i) 승인규칙 (Rule of Recognition): 무엇이 유효한 법규칙인지를 식별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규칙입니다.


(ii) 변경규칙 (Rule of Change): 기존의 규칙을 만들거나 바꾸거나 없애는 절차를 규정하는 규칙입니다.


(iii) 재판규칙 (Rule of Adjudication): 규칙 위반 여부를 판단하고 제재를 가할 권한을 부여하는 규칙입니다.



하트는 이 일차적 규칙과 이차적 규칙의 결합이야말로 ‘법체계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승인규칙은 어떤 규칙이 특정 기준(예: 의회 제정, 판례)을 통과하면 유효한 법으로 인정받게 해주므로, 법체계의 통일성을 부여하고 ‘법적 효력’이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승인규칙은 법체계 내에서 다른 모든 규칙의 효력 근거가 되는 ‘궁극적인(ultimate)’ 규칙입니다.


III. 승인규칙은 단순한 관행인가?: 사회적 규칙과 내적 관점

- 하트 이론의 핵심, '수용'된 사회적 규칙으로서의 승인규칙과 그 의미 탐구하기


승인규칙은 법체계의 궁극적 토대이지만, 흥미롭게도 승인규칙 자체의 효력 근거를 묻는 또 다른 규칙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승인규칙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하트는 승인규칙의 존재가 ‘사실’의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즉, 법원(法源)이나 공직자들, 특히 법관들이 실제로 법을 식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들과, 시민들이 그렇게 식별된 법을 일반적으로 따른다는 사회적 사실을 통해 승인규칙의 존재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트가 법명령설을 비판하며 제시한 ‘사회적 규칙(social rule)’ 개념이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히 처벌이 두려워 따르는 것(‘어쩔 수 없이 하는 것’)과 진정으로 따라야 할 ‘의무(obligation)’를 느끼는 것은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의무감의 배경에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특정 행위 패턴을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이끌고 평가하는 공통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칙의 존재를 이해하려면 외부 관찰자의 시각만으로는 부족하며, 규칙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적 관점(internal point of view)’을 고려해야 합니다. 즉, 규칙을 비판과 자기비판의 근거로 삼는 참여자의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트는 승인규칙이 바로 이러한 사회적 규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법을 도덕과 분리하려는 법실증주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법의 규범성을 설명하는 핵심 논거가 됩니다. 1950년대 말, 하트는 자연법론적 입장을 견지한 론 풀러(Lon Fuller)와 유명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풀러는 하트가 말한 “핵심적인 입법절차를 규율하는 근원적이고 수용된 규칙들”이 결국 사람들이 법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도덕적 규범일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습니다. 법의 기초를 찾다 보면 결국 도덕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트는 승인규칙에 대한 사람들의 ‘수용(acceptance)’이 반드시 도덕적 신념 때문일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이익 계산, 남들에 대한 이해관계 없는 관심, 반성 없이 물려받았거나 전통적인 태도, 그저 남들처럼 하고 싶어 하는 바람 등 여러 가지 상이한 고려’”에 기초하여 승인규칙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트는 법의 기초를 물리적인 힘(오스틴)이나 도덕(자연법)이 아닌, 참여자들의 ‘수용된 권위’ 위에 두는 독자적인 법실증주의 이론을 구축했습니다.


IV. 승인규칙을 둘러싼 거대한 논쟁: 드워킨의 비판

- 법은 규칙뿐 아니라 원리도 포함하는가?: 하트 이론에 대한 드워킨의 도전과 '해석으로서의 법' 개념 살펴보기


하트의 승인규칙 이론은 법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강력한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하트의 뒤를 이어 옥스퍼드대 법철학 교수가 된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의 비판은 매우 중요합니다. 드워킨은 법이 하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한 기준(승인규칙)으로 식별되는 ‘규칙’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법에는 규칙 외에 ‘법원리(legal principles)’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주로 하트 이론을 염두에 둔)의 핵심 주장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i) 법규칙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이나 절차(계통, pedigree)에 따라 식별된다.


(ii) 규칙으로 명확히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사건(hard case)에서 법관은 재량을 행사한다.


(iii) 법규칙이 없으면 법적 권리나 의무도 없다.


드워킨은 이 세 가지 주장이 법원리에 대해서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도 자신의 부정한 행위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없다’”와 같은 법원리는, “‘세 명의 증인이 서명하지 않은 유언장은 무효’”와 같은 법규칙과 성격이 다릅니다. 규칙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반드시 적용되거나 적용되지 않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or-nothing)’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원리는 특정 방향으로 결정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질 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또한 규칙들이 충돌하면 하나는 무효가 되지만, 원리들이 충돌할 경우 법관은 각 원리의 ‘상대적인 무게’를 저울질하여 판단합니다.


결정적으로 드워킨은 이러한 법원리들이 입법부나 법원의 특정 결정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법률가들과 공중(公眾)에 개발된 적실감(適實感; a sense of appropriateness)”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승인규칙과 같은 형식적인 계통 심사 기준으로는 법원리를 식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실증주의의 주장 (i)은 틀렸습니다. 또한 어려운 사건에서 법관은 재량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법원리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미 존재하는 법적 권리를 찾아 판결해야 하므로 (ii)와 (iii) 역시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드워킨은 하트 이론의 근간인 ‘사회적 규칙’ 이론 자체를 공격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관행이 규칙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규칙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며, 관행적 규칙의 내용에 대한 다툼은 결국 어떤 관행이 실제로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규칙이 정당한가를 둘러싼 도덕적 논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법관이 재판에서 법규범을 적용하는 것은 사회학자처럼 외부에서 규칙을 ‘기술(記述)’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로서 그 규칙을 근거로 판결을 ‘평가’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적 의무의 근거는 단순한 사회적 관행(승인규칙)이 아니라, 정치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규범적 원리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드워킨은 “법은 해석적인 개념”이라고 선언합니다. 법은 단순히 과거의 결정(법률, 판례 등)이라는 ‘명백한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공동체의 역사와 원리를 바탕으로 그 사실들을 도덕적으로 가장 정당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구성적으로 해석(constructive interpretation)하는 실천(practice)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적 실천이 법의 본질이므로, 법의 기초로서 별도의 관행적인 승인규칙은 필요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드워킨은 주장합니다. “승인규칙은 없다!


V. 법과 도덕의 관계 재정립: 법실증주의의 분화

- 승인규칙에 도덕이 포함될 수 있는가?: 배제적 법실증주의와 포용적 법실증주의의 대립 분석


드워킨과 같은 비실증주의 진영의 강력한 비판에 맞서 법실증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분화했습니다. 특히 승인규칙에 도덕적 기준이 포함될 수 있는지, 즉 법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정의로움', '공정함'과 같은 도덕적 요소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법실증주의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a) 배제적 법실증주의 (Exclusive Legal Positivism):


이 입장은 승인규칙에 도덕적 기준이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논자로는 조셉 라즈(Joseph Raz)와 스콧 샤피로(Scott Shapiro), 안드레이 마머(Andrei Marmor) 등이 있습니다.


* 라즈의 권위 논변: 법은 본질적으로 정당한 ‘권위(authority)’를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권위에 따르는 이유는, 권위의 지시가 그 지시의 근거가 되는 복잡한 이유들(예: 도덕적 고려)을 스스로 따져보지 않고도 행동 지침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법의 존재나 내용이 도덕적 논증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면, 법은 이러한 권위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법은 도덕적 논변 없이 사회적 사실(예: 입법 행위, 판례)만으로 식별될 수 있어야 합니다.


* 샤피로의 실질적 차이 논변: 법은 사람들의 행동에 실질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무엇이 법인지를 도덕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그냥 도덕에 따르면 되지 굳이 법에 따를 이유가 없게 됩니다. 즉, 도덕적 기준을 포함하는 승인규칙은 법이 규범 생활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도 만들지 못하게 하므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마머의 구성적 관행 논변: 승인규칙은 단순한 행위 조정 관행(예: 좌측통행)이 아니라, 특정 활동(예: 체스 게임)의 의미 자체를 만들어내는 ‘구성적 관행(constitutive convention)’입니다. 법의 연원을 확인하는 승인규칙은 이런 구성적 관행인데, 도덕은 관행으로 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승인규칙에 포함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배제적 법실증주의에 따르면,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헌법 제10조)이나 ‘법 앞의 평등’(헌법 제11조)과 같은 조항들은 비록 법전에 쓰여 있더라도 그 자체로는 법규범이 아니라, 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도덕규범으로 간주됩니다.


(b) 포용적 법실증주의 (Inclusive Legal Positivism):


이 입장은 승인규칙에 도덕적 기준이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특정 법체계의 사회적 관행(승인규칙)이 허용한다면, 법의 유효성 판단 기준으로 도덕적 원리가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트 자신도 말년에 이 입장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으며, 줄스 콜먼(Jules Coleman) 등이 대표적인 지지자입니다.


* 관행성 논거: 법의 기초는 결국 사회적 관행(수용)이므로, 그 사회의 관행이 도덕적 기준을 법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이론적으로 이를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콜먼은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이 실제로 도덕 원리들을 법의 기준으로 ‘합체(incorporate)’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는 것이 현실 기술적인 법이론으로서 법실증주의의 취지에 더 맞다고 주장합니다.


* 확실성 반박: 법실증주의가 법의 확실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법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인 명확성을 요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승인규칙에 도덕적 기준이 포함된다고 해서 법체계 전체가 완전히 불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은 법의 본질적 속성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중층적 법체계 논거: 법체계는 다양한 규범들이 여러 층위에서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구조입니다. 상위 규범(예: 헌법의 도덕 원칙)이 하위 규범(예: 법률)의 효력이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도덕 규범이 이러한 상호작용의 일부가 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포용적 법실증주의에 따르면, 헌법의 기본권 조항처럼 도덕적 내용을 담은 규범도 사회적 관행(승인규칙)에 의해 법의 일부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VI. 87년 체제를 설명하는 다양한 렌즈: 풀러, 드워킨, 켈젠

- 비실증주의와 켈젠의 근본규범 이론으로 본 87년 체제 변화의 의미와 한계 검토하기


이제 하트의 승인규칙 이론 외에 다른 법이론들은 87년 체제의 법적 변화, 즉 헌법재판 활성화와 기본권 실효성 확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 론 풀러 (Lon Fuller)의 관점:


풀러는 법을 단순히 주어진 사실로 기술하는 법실증주의를 비판하며, 법이란 더 좋은 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협동적인 노력과 성취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법률가들이 “‘뭐가 법이지?’만큼이나 ‘뭐가 좋은 법이지?’” 라는 질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풀러가 87년 체제 변화를 보았다면, 한국 사회가 과거와 달리 법규범의 도덕적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묻고 따지며 ‘좋은 법’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것입니다. 즉, 법에 대한 참여자들의 ‘태도’ 변화로 이해할 것입니다.


* 로널드 드워킨 (Ronald Dworkin)의 관점:


드워킨에게 법은 과거의 법적 자료들(법률, 판례 등)을 공동체의 원리(정의, 공정성, 통합성 등)에 비추어 도덕적으로 가장 정당하게 ‘해석’하는 실천입니다. 87년 체제에서 시민들과 공직자들이 헌법의 기본권 조항(원리)에 비추어 법률의 정당성을 따지고 헌법재판을 통해 다투게 된 현상은, 바로 법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해석적 태도(interpretive attitude)’ 또는 그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적인 태도’가 활성화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단순히 주어진 법을 따르는 것을 넘어, 무엇이 진정으로 정당한 법인지를 스스로 묻고 해석하려는 태도가 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풀러나 드워킨의 설명은 87년 체제의 변화를 법 고유의 변화라기보다는 참여자들의 ‘태도’나 ‘도덕적 노력’의 변화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점진적인 ‘정도’의 문제로 파악하여, 87년이라는 시점을 기준으로 법질서에 어떤 질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포착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 한스 켈젠 (Hans Kelsen)의 관점:


하트와 함께 20세기 법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켈젠은 법체계의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근본규범(Grundnorm)’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근본규범은 실제 존재하는 규칙이 아니라, 법질서 전체의 효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설적으로 전제되는’ 최상위 규범입니다. 그 내용은 단순히 ‘최초의 역사적 헌법에 따라야 한다’는 형식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법체계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형식적인 근본규범 개념으로는 87년 체제와 같은 특정 법체계의 구체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켈젠 이론의 다른 측면을 보면 흥미로운 설명이 가능합니다. 켈젠은 법의 핵심 특징을 ‘강제 질서’로 보았고, 법규범을 강제와 직접 연결된 ‘독립적 규범’과 그렇지 않은 ‘비독립적 규범’으로 나누었습니다. 헌법 조항이라도 강제 규범과 연결되지 않으면 법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조항도, 그에 근거하여 위헌 법률을 폐지하는 등 강제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비로소 법규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87년 체제의 변화는 과거에는 ‘법규범이 아니고 정치 도덕 이론 또는 법이론’에 불과했던 기본권 조항들이, 헌법재판 제도 등을 통해 강제 질서(다른 법규범들의 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진정한 ‘법규범’으로 인정받게 된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 내부의 변화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풀러나 드워킨의 설명보다 법 고유의 측면을 더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켈젠 이론은 왜 특정 시점(87년)에 그러한 변화가 가능했는지, 즉 기본권 조항이 ‘실효성’을 확보하게 된 계기를 법체계 외부의 사회적, 정치적 요인에 의존할 뿐 법 내부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근본규범 자체가 형식적이어서 시대적 변화를 구분하는 데는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VII. '승인규칙의 변화'로 87년 체제 읽기

- "무엇이 법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의 근본적 인식 변화로서 87년 체제를 설명하는 하트 이론의 설득력 분석


그렇다면 하트의 승인규칙 이론은 87년 체제의 법적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본 논문은 이 이론이 가장 적절한 설명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하트 이론에 따르면, 87년 체제의 변화는 간단히 말해 한국의 승인규칙이 바뀌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무엇이 법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 특히 법률가와 공직자들의 근본적인 생각이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하트의 승인규칙은 켈젠의 근본규범과 달리 가설적인 전제가 아니라, 특정 사회에서 실제로 법을 식별하고 적용하는 데 사용되는 관행적인 기준입니다. 따라서 승인규칙은 법체계마다 내용이 다를 수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혁명이나 독립으로 새로운 법체계가 들어서면 승인규칙도 바뀌고, 하나의 법체계 안에서도 사회적 합의나 법적 실천의 변화에 따라 승인규칙의 내용이 점진적으로 또는 급격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하트는 승인규칙이 항상 명확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그 의미나 적용 범위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승인규칙 역시 다른 규칙들처럼 “분명하게 적용되는 핵심적인 사안들과 적용 여부가 불분명한 반영부(反影部)가 있어서 ‘개방적인 구조’”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툼은 결국 사법부의 결정이 사회적으로 권위를 얻으면서 해결되곤 합니다. 또한 법체계의 존재 조건으로 (i) 공직자들의 이차적 규칙 수용과 (ii) 시민들의 일반적인 법 준수를 들면서도, 공직자들 사이의 합의가 부분적으로 깨지거나 시민들의 준수가 일시적으로 약화되더라도 법체계의 동일성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는 유연성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변화와 갈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개념인 승인규칙을 통해 87년 체제의 변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87년 이전 한국 사회의 승인규칙은 주로 '국회가 제정한 법률'이나 '대법원 판례' 등을 유효한 법의 기준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시민들과 공직자들(특히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던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법률의 효력을 판단하고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실효적인 법규범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무엇이 유효한 법인지를 식별하는 기준, 즉 승인규칙의 내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검토한 다른 이론들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i) 87년 체제의 변화를 단순히 참여자의 태도 변화나 외부 요인의 결과가 아니라, 법체계의 근본적인 토대 규칙(승인규칙) 자체의 변화로 파악함으로써 법 고유의 설명을 제공합니다.


(ii) 형식적인 근본규범과 달리 내용이 변할 수 있는 승인규칙 개념을 통해, 87년이라는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법질서의 질적 변화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하트의 승인규칙 이론이 87년 체제에서 나타난 헌법재판 활성화와 기본권 실효성 확보라는 심대한 법적 변화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이론적 틀이라고 결론짓습니다.


VIII. 87년 체제,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승인규칙 변화의 의미와 한국 법체계의 미래에 대한 성찰


지금까지 H.L.A. 하트승인규칙 이론을 중심으로 87년 체제가 가져온 한국 법의 중요한 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87년 체제의 핵심적인 법적 변화는 ‘무엇이 법인가’에 대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기준, 즉 승인규칙이 획기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이 더 이상 장식적인 문구가 아니라 법률의 효력을 좌우하고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법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한국의 승인규칙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물론 하트의 이론이 법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만능 열쇠는 아닐 것입니다. 법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는 다른 이론들이 더 나은 통찰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87년 체제 자체에 대한 평가나 미래에 대한 논의(예: 통치구조 개편 논의)는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의 승인규칙 역시 앞으로 사회 변화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87년 체제를 통해 이루어진, 기본적인 인권 규범들이 다른 모든 법규범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 승인규칙의 변화는 한국 헌정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아마도 되돌리기 어려운(불가역적인) 전환일 것입니다. 이는 법이 단순히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근본 가치를 담아내고 실현하는 규범 체계임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습니다. 하트의 승인규칙 이론은 바로 이러한 법의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 우리 시대 법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유용한 분석 도구를 제공합니다.


[독자의 평가와 일독을 권하는 이유]


이 논문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인 '87년 체제'를 딱딱한 정치사적 분석을 넘어,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하여 탐구합니다. H.L.A. 하트라는 현대 법철학 거장의 핵심 이론인 '승인규칙'을 통해, 헌법 조항들이 어떻게 단순한 문자를 넘어 우리 삶을 규율하는 '살아있는 법'이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풀어냅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법철학 개념들을 켈젠, 드워킨 등 다른 사상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입체적으로 제시하며, 한국 사회의 법적 변화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고 유익합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관계, 그리고 우리 사회의 법적 토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본 글은 안준홍, "87년 체제와 승인규칙의 변화" <외법논집> 제36권 제4호 pp.263-278 (2012), KCI 등재논문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정확한 인문학적 개념의 이해와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전문적인 학술 논의를 대체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해설은 원문의 취지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설자의 학술적·정치적 견해나 가치판단,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원문 전부는 KCI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TextSear.kc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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