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서비스기획자, 여행, 재테크, 지방출신, 생존

이세현님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면?

by 식부름 지나

*이 글이 쓰인 당시는 24년입니다. 그는 이제 만 29가 되어버린. 못 올린 인터뷰 몇 편을 올리고, 재연재를 할 생각입니다. 미룬 분들에 심심한 사과와 위로를 올립니다. —식부름 지나.



세현님을 만난 건 그가 입사 일주년을 맞은 직후였다. 경남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11년. 포털 회사에서 광고 상품을 기획하는 28살.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다섯 키워드 중 마지막에 '생존'을 놓았다. 나는 그 단어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IT 서비스 회사에서 돈 벌고 있는 28살 마포 사는 이세현입니다.


현재의 나를 표현하는 다섯 키워드는요?

IT기획자, 여행, 재테크, 지방출신서울사람, 생존.


IT기획자, 여행, 재테크,

지방출신서울사람, 생존.






다섯 번째가 생존이었다. 나는 그게 두려움에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자부심에서 나온 말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생존에 대한 정의는 뭔가요.

서울로 온 이상, 돈과 실력으로 여길 벗어나지 않는 게 제 정의인데요. 돈이 없어서, 혹은 실력이 없어서 더 이상 있지 못하는 게 두려워요. 나이가 들어서는 상관없는데, 지금 나이에서는요, 직장도 이 근처니까요.


— 그게 두려움 아닌가요.

그렇죠. 두려움이에요. 근데 그 두려움이 저를 움직이기도 해요. 여기 있으려면 계속 뭔가를 해야 하니까요. 어디에 가도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가끔 자존감이 흔들리기도 해요. 특히 환경이 점점 더 치열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가끔씩은 현타가 오기도 하고요. 그만큼 자존감을 지키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속도가 빠르고 조급해지는 건 긍정적인 자극이 되기도 해요.

이 선택이 더 좋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직업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좋더라고요. 특히 서울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직업을 알지 못했을 것 같아요.


두려움을 동력으로 쓰는 사람의 얼굴은 대개 담담하다. 세현님도 그랬다.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의 표정.— 성공이랑은 어떻게 다른가요?

'성공'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구체적인 뭔가를 이룬다고 그런지도 모르겠고요. 뭔가 하나 이루고 다 달라지는 건 맞는데, 그걸로 성공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성공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처음부터 포기한 것은 다르다. 그는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1 IT서비스 기획자



— 현재 하고 계신 일을 소개해주세요.

포털회사에서 광고 상품을 기획하는 기획자로 일하고 있어요. 통합검색할 때 노출되는 광고상품을 개선하고, UI도 하고, 광고 매칭, 새 광고 형태 개발을 하고 있어요.


— 어떤 업무인가요?

검색광고나 배너 광고의 통합 개발을 하고 있어요. 광고주 입장에서 효율이 먼저고, 종류는 덜 중요해요. 그러니 이걸 효율 있게 통합해 나가는 거 같아요.

— 업무 중 나와 잘 맞는다 싶은 부분이 있나요?

지금 팀에서는 각자 3-4개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요. 크게 보면 탑다운이지만, 세부적인 걸 살리는 건 각자 역할인 것 같아요. 업계 특성상 직접 부딪히면서 배워요. 엄청 잘 맞진 않아도 재밌어요. 다른 일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저와 잘 맞는 걸 알지도 못하고요.



'잘 맞진 않아도 재밌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천직을 찾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을 납득하며 사는 사람의 언어였다. — 포털 기획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인생은 운도 있는 것 같아요. 스타트업에서 이직하는 게 제일 현실적이고, 저도 그렇게 했지만, 회사마다 하는 건 조금씩 다르거든요. 지금 회사 채용공고가 전 회사랑 맞았던 건 운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좁은 길을 무작정 2-3년 하기보다도, 일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 경험을 해보면서 결정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 입사 후 이 회사의 좋은 점을 꼽는다면요.

3년 만근을 채우면 6개월 무급 휴직이 가능해요. 전 그때 길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요.

복지 혜택 중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휴직이었다. 일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일만 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






#2 여행은 그냥 하고 싶은 일



— 지금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나요?

아이슬란드예요. 진짜 죽을 뻔해서예요. laugavegur에 4박 5일 트레킹을 동행 없이 혼자 갔어요. 첫날에 비도 많이 오고 안개도 많이 끼니, 사람이 안 보이더라고요. 가방 안엔 초코바, 육포, 아몬드, 저녁엔 라면수프, 밥, 쌀 챙겨가거든요. 5일 치를 챙겨가요. 당 떨어질 때 배낭 꺼내서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가방 내려놓는 순간 체온이 떨어지니까 가방을 못 내려놓는 거예요. 기온은 2-3도밖에 안 되지만 계속 비가 와서, 걷는 걸 멈추면 체온이 확 떨어져요. 둘째 날에는 상의 주머니에 아몬드, 육포를 옮겨놓고 계속 먹으면서 갔어요.

죽을 뻔한 여행을 가장 좋은 여행으로 기억하는 사람. 고통의 강도와 기억의 선명함이 비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감각이 좋았던 것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이미 답하고 있었다.


— 그게 왜 가장 기억에 남나요. 힘들었던 거 아닌가요.

힘들었죠. 근데 2-3달 지나면 다시 생각나고 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설명이 잘 안 돼요. 그냥 그래요.

— 여행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취업 전이었어요. 수중에 400만 원 정도 있었는데, 아이슬란드는 터무니가 없었거든요. 부모님께 300만 원 빌렸어요. 취업하면 갚겠다고 하고요. 직장인이 되면 3주 여행은 불가능하니까 지금 가야겠다 판단한 거였어요. 비행기, 장비 빼면 450만 원으로 21일을 다녀온 거였어요.

— 부모님께 빌린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 돈이 큰돈이라는 건 알았어요. 근데 지금 안 가면 영영 못 간다는 게 더 컸어요. 학생 때는 남는 게 시간이고, 가난하게 여행해도 좋았어요. 남미를 가도 2달 동안 500만 원 썼고, 태국은 3주 동안 비행기 포함해 90만 원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가능했어요.




— 지금은 그렇게 못 가나요.

지금은 변곡점이에요. 공항 노숙도 안 하고, 비행기도 30만 원 차이면 직항 타요. 그게 돈을 벌어서일 수도 있고,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예전엔 더 고생해도 괜찮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덜 했는데 말이죠.


— 좋아하지 않게 된 건지, 아니면 그냥 지쳐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구분이 안 돼요.

짧은 답이었다. 모른다는 말을 이렇게 빠르게 하는 사람은 대개 두 가지다. 정말 모르거나, 너무 잘 알거나.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뭐가 달랐으면 좋겠어요.

6개월짜리 세계여행을 가라고 하고 싶어요. 그 당시엔 공백기가 취업에 불리하단 말을 듣고 포기했어요. 과거로 가면, 뭐든 하기 전 덜컥 겁먹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지금 회사 다니면서 가는 게 더 힘들거든요.


— 여행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거나, 이를 통해 사람을 바꾼다고 생각하나요.

보통 여행 에세이가 굉장히 감성적이잖아요. 가서 인생을 되돌아본다거나. 전 이런 건 없고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힘들다. 이런 생각만 해요. 미얀마 갔을 때도 배탈 나고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만 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마주하잖아요. 그러다가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느끼고 와요. 근데 그게 다예요. 거창한 건 없어요.


인생 100년 있다고 하면, 지금 안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행은, 단순히 떠나고 싶은 거예요.


여행을 미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2-3달이 지나면 다시 가고 싶어 진다고 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냥 하고 싶은 것. 그것이 세현님에게 여행이었다.






#3 재테크, 지방출신서울사람, 그리고 생존


— 일과 돈에 있어 달성 목표가 있나요?

일에서 잘되고 빛나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걸로 끝을 낸 사람이겠죠? 저는 하나를 그렇게 깊게 좋아해서 끝을 내진 못했고요. 대신 넓고 얕게 하려고 해요.

돈은 목표보단 생존이에요. 본가가 경남 마산이니까, 주거에 대한 고민을 해요. 머물 곳이 있어야 안정이 되는 것 같아서요. 집을 떠난 지 11년 정도 됐거든요. 여기서 직장 생활하고 쭉 살기 위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돈은 무조건 아낀다기보다는 어떻게 가치 있는 거에 쓸지 고민해요.


— 의미 있는 소비가 있었나요?

의자랑 스피커요. 가구는 무인양품에서 USM 모듈과 비슷한 걸로 샀어요. JBL 스피커는 250만 원 주고 구매했는데, 스피커의 끝은 부동산이라고도 하더라고요. 이사 가면 계속 더 좋은 걸 장만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막연한 꿈 중 하나가 노후에 음악 감상실을 만드는 거예요. 파주의 카메라타를 좋아하거든요. 권리금 없는 데 빌려서 운영하고 싶어요. 돈을 벌려고 보단 취미처럼 하고 싶고, 그 정도 여유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음악 감상실이요. 왜 하필 그건가요.

그냥 좋아하니까요.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거창한 이유가 없다는 말이 오히려 가장 단단한 이유처럼 들렸다.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오래된 것들은 대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 그 꿈을 위해 지금 뭔가 하고 있나요.


LP랑 CD를 모아요. 음악 들을 때 90퍼센트는 유튜브로 들어요. 그럼 왜 모으냐 싶잖아요. LP는 빈티지한 느낌이 있잖아요. 음악은 1년 전에 듣던 걸 지금 안 듣거든요. 그런데 괜찮았던 앨범을 사놓으면 기억하기도 좋잖아요. 10년 뒤에 하나씩 물질로 쌓이는 게 좋아요. 아카이빙이 되잖아요. 갑자기 공간 만든다고 엄청 사는 건 멋이 없잖아요.


듣지도 않을 음악을 사는 이유가 아카이빙이었다. 꿈을 위해 거창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리에서 조용히 쌓아두는 것. 어쩌면 그것이 세현님이 서울에서 버티는 방식과 닮아있었다.




생존을 정의로 삼는 사람이 자유를 꿈꾼다는 것. 그 모순을 어떻게 안고 사는지 궁금했다.

—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지금.


별로요. 인생의 문구가 하나 있는데,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예요. 누가 카톡 커버로 해놨던 걸 저장했는데, 제 삶은 너무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 되어버렸어요. 돈을 벌면서 더 소속되고요. 사고방식 기저에 돈을 많이 느끼는데, 돈에 얽매이는 삶이 자유로운 건 아니죠.

좋아하는 문구와 자신의 삶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 그 거리를 좁힐 생각은 없나요.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쌓아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쌓아야 할 때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자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순서를 정해둔 것이었다.


— 창업은 고민해 본 적 없나요. 주변에 많잖아요.

많죠. 저도 언젠가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저는 24시간 통제가 잘 안 되고, 틀 안에서 동기부여를 잘하는 것 같아요. 직장인이 잘 맞다고 생각해요. 마흔 살까지는 무조건 다니지 않을까 생각해요.


— 마흔이 기준인 이유가 있나요.

딱히요. 그냥 그때까지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오 년 뒤의 자신에게 재정적으로 묻는다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그때도 차는 안 샀지? 차는 집 사고 나서 사는 게 좋을 거야. 경제적 자유는 거창한 목표고, 돈 때문에 제약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길. 저는 결정할 때 최상, 최악을 생각하고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선택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허무맹랑한 사람은 아니지만, 재미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허무맹랑하지 않다는 것과 재미없다는 것을 같은 문장에 놓는 사람. 스스로를 꽤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



세현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거창하지 않아도 자기 기준이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넓고 얕게, 머물 곳을 지키며,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조금씩 쌓아가는 것.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방식이었다. 이번 대화에서 나는 다시 음악 앨범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세현님이 추천해 준 앨범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세현님의 앨범 추천

Laufey — Everything I Know About Love 그는 이 앨범을 추천했다.

2년이 지났다. 그가 허락한다면, 이제는 동천동 아파트 자가를 마련한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