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해변 위의 맨발학
바다는 늦은 계절의 메신저다. 여름이 한창일 때에도 바다는 한결같이 차갑고, 가을이 깊어질 무렵에서야 그 따스함을 서서히 잃는다. 이제 겨울 중턱에 선 바다는 그 차가움을 온전히 드러내며 새로운 얼굴을 내보인다. 이 변화는 맨발로 걷는 사람들에게 단순 계절의 흐름 이상이다. 자연의 리듬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12일, 동해 어달해변에서 382일 차 맨발 걷기를 진행했다. 어달 해변은 소지섭이 출연한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 촬영 배경지로 유명한 곳이다. 드라마 주인공 소지섭 벤치 뒤에 위치한 카페 ‘어쩌다 어달’은 지금도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영하 6도 이하의 날씨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땅과 바다를 맨발로 느끼며, 계절과 날씨, 내 몸의 변화를 기록해 왔다. 맨발 걷기는 일반 신체 활동이 아니다. 나 자신과 자연을 연결하는 깊은 명상이며, 동시에 자연이 지닌 치유의 힘을 배우는 시간이다. 겨울 해변에서 걷기는 다른 계절과 다르다. 차가운 모래와 바닷물은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며, 인간이 자연에 순응해야 할 이유를 다시금 일깨운다.
겨울 해변에서 맨발 걷기는 자체로 철학적이다. 발바닥이 차가운 모래에 닿는 순간, 나는 나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자연이 주는 모든 것이 그렇듯, 이 경험에도 위험이 따른다. 차가운 모래와 바닷물은 발의 감각을 일깨우지만, 무리한 시도는 동상과 같은 부상을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백사장 끝 가장자리로 걸어간 뒤, 파도가 지나간 촉촉한 백사장을 맨발로 걷는다. 그날 기온에 따라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수위는 조절한다. 가능하면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을 선택해 걷는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모함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같은 작은 실천이 필수적이다. 자연과의 조화는 감각적인 열정만이 아니라, 세심한 배려와 책임감 위에서 이루어진다.
겨울 바다는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풍경이다. 여름의 생동감 넘치는 해변과는 전혀 다르게, 겨울바다는 고요하고 차분하며, 어쩌면 조금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는 특별한 여운과 깊이가 있다. 차가운 바닷바람과 물결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한껏 열게 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백을 발견한다. 바다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속도를 조정하고, 자연이 보여주는 순리에 순응한다.
맨발 걷기를 통해 깨달은 큰 진리는 ‘순응’이다. 차가운 겨울 바다를 걷는 시간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나의 의지로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나를 조정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이다. 인간이 본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몸소 깨닫는 순간은 강렬하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움은 단순히 감각적인 자극에 그치지 않는다. 내면의 소리를 더욱 명확히 들리게 한다. 그 소리는 대부분 ‘멈춤’과 ‘관찰’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겨울 바다에서 맨발로 걷는 것은 운동이나 이색 체험을 넘어선다. 자연이 주는 교훈에 스스로를 맡기는 의식이다. 오늘 나는 차가운 모래를 밟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겨울 바다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질문이다. 삶이 고요해지고, 차가운 현실에 직면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자연 속에서의 경험을 넘어 우리의 일상과 사회, 인간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바다처럼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결국 겨울 바다에서의 맨발 걷기는 우리가 자연에 순응하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다. 동해의 차가운 바닷바람과 파도의 리듬 속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듣고자 할 때에만 진정으로 들린다.
이 겨울, 당신도 해변을 걸으며 차가운 바람과 모래의 온도를 느껴보길 바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다. 자연은 우리의 스승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겨울 바다는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차가운 계절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겨울의 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