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체에서 믿보체로 1

by 꾀돌이

돌이켜보면 멋없고 가소로운 건 나였다. 그때의 나는 유치했고 어리석었다.




믿거체. 믿고 거르는 체육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나도 한때는 확신의 믿거체였다. 체육과는 단무지-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맞다-라서 확실하게 믿고 걸러야 한다며 다소 조롱 섞인 비난을 죄책감 없이 내뱉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는 군대놀이라도 하는 듯한 체육과의 집합문화나 똥군기가 못내 거북했다. 군대에 있어야 할 군기를 왜 체육과에서 찾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만났거나 들었던 체육과의 면면이 믿거체 대한 실체 없던 의심을 확고한 신념으로 바꾸게 했다. 내가 만났던 체육과들은 대체로 허세를 부리던가, 가오를 잡던가, 곤조를 내던가 혹은 셋 다 있던가, 였다. 정말 멋없었다.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교사가 된 나는 믿거체와 함께 매일 근무를 해야 했다. 믿고 걸러야 한다고 생각하던 대상이 직장동료가 되었다. 혼자 난감했다. 잘 숨기고 감추면서 일하고 생활했지만 이따금씩 들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멋없고 가소로운 건 나였다. 그때의 나는 유치했고 어리석었다.




학교에도 3D가 있다. 힘들거나 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워서 기피하는 일 말이다. 대부분 학교폭력이나 생활지도와 관련된 업무를 꺼린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이 일을 체육교사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폭력이나 생활지도를 이유로 교사 앞에 서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부드럽고 상냥한 경우는 거의 없다. 때로는 고성이나 욕설을 듣고 협박이나 엄포를 감당하고 교사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상황도 겪어내야 한다. 드물게는 법정 다툼까지 벌이게 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냐마는 학교폭력이나 생활지도 때문에 발생된 여러 가지 상황들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되어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하는 교사들이 있다. 생각보다 꽤 많다.


학교의 몇몇 아이들은 인격적으로 사람과 짐승 사이의 단계에 있는지 교사를 대할 때 본능적으로 힘과 기운을 감지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저 착하고 친절하기만 한 교사가 생활지도를 할 때 그 아이들의 눈빛은 아니꼽고 말투는 띠껍다. 같은 생활지도를 엄격하고 무서운 교사가 하면 잘못을 아는 듯한 어깨와 반성을 할 법한 고개의 각도로 제법 무거운 낯빛을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썩 훌륭하다. 교사의 말 몇 마디에 실수를 깨닫는 정도면 아주 괜찮다. 학교에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듯한 아이들도 있다. 교사에게 발길질을 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아이들도 더러 있다. 이런 아이들도 가르치고 타이르며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 때로는 제압해가며.

초임 시절엔 거친 아이들의 생활지도를 보란 듯이 잘 해내거나 성공했을 때 같잖은 우월감이나 저급한 성취감 따위의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생활지도를 매끄럽게 잘하고 아이들의 거짓 주장의 논리를 잘 공격하고 파헤쳐 사실이나 진실을 털어놓게 만드는 내 모습이 유능하고 자질이 높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싸구려 자신감은 금세 그 허상을 들키고 깨지기 마련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겨우 열몇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말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들의 핑계와 거짓말에 속지 않고 허점을 공격해야 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마치 내가 아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진 느낌이 들어 불편하고 언짢았다. 아주 가끔은 내가 교사인지 형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런 불쾌한 감정과 혼란한 마음은 나이를 먹고 경력이 많아질수록 더욱 크고 강해졌다.

내가 느꼈던 이런 못마땅한 기분을 체육교사는 느끼지 못하겠는가. 개인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게다. 이는 가르치는 교과나 학교급과는 상관없이 교사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다. 분명 체육교사도 그 힘든 심정을 이겨내거나 버티면서 학교폭력과 생활지도를 담당하리라. 난 어느 순간부터 기껍지 않더라도 이 일을 맡아주는 그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운동은 그 자체로 가치롭다. 운동이 수단이 되는 상황도 가치 있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운동이 기분을 전환시키는 방법이 된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게 고민을 내려놓거나 그 이후에 답을 찾게 되는데 도움이 된 경험이 있다. 그저 걷거나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생각과 감정이 환기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 외출이 힘든 우울증 환자들이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의사들이 조언하는 이유를 이제는 잘 알 것 같다.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수록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하는 것이 마음을 정화시키는 방법이 되는 것을 느낀다. 내 경우에는 수영이 가장 효과가 있었다. 머리를 비우는 데 수영만 한 운동이 없었다. 수영은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물을 먹게 되기 때문에 오로지 내 몸을 움직이는 데만 집중하게 된다. 실내수영장 물을 먹는다? 상상만 해도 너무 싫다. 그 물을 안 먹으려면 오직 수영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뒤엉킨 머리와 힘든 마음을 운동으로 비워 낸다.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단순해서 의미가 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운동의 힘을 거의 매일 느끼며 살게 되면서 운동이 직업인 사람들의 저력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서야 운동의 가치를 조금은 깊이 있게 깨달았다. 체육과의 힘은 몸을 움직이는 데서 나오는 걸 테다. 운동의 가치를 일찍부터 알고 매일 실천하는 체육인들에 대한 관념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머리보다 몸을 쓰는 게 맞거나 중요한 상황이 있다. 운동과 같이 몸을 쓰는 일은 행동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것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익숙해지는 게 효율적이다. 머리로 생각한 뒤에 행동하면 속도가 느려진다. 먼저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한 뒤에 몸을 움직이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몸이 조건반사처럼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게 필요하다. 학교에서는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먼저 몸부터 움직이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는 경우가 있다. 교사가 생각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미 몸을 움직여 다치거나 사고가 발생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사건은 부지불식간에 터진다. 머리의 생각보다 몸의 움직임이 훨씬 빠른 순간이다. 이럴 때는 빨리 몸을 움직여 대응하는 게 답이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돌발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거나 판단이 서질 않아 내가 우왕좌왕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몸을 움직이는 게 일상인 체육과의 신속한 대처가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이 있었다. 체육과가 동료여서 든든하고 다행스러웠던 기억이 있었다.


수학, 국어, 영어, 과학, 사회, 역사... 지식을 가르치는 교과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 사회의 구조와 경향이 그러할진대 학교라고 다를 제간이 있겠는가. 어쩌면 교육과 학교가 교과를 서열화하는 걸지도.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는 대포자-대학을 포기한 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역포자-역사를 포기한 자-는 없거나 적어도 수포자는 너무 많다. 하지만 인간이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음악, 미술, 체육이 반드시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소위 말하는 지, 덕, 체를 고루 갖춘 전인적 성장과 합리적인 민주시민의 육성을 위해 여러 교과를 가르치고 다양한 교육활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교사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때는 체육 수업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싫어했다. 교사로 학교를 다니면서 체육 수업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믿보체. 이제 내가 믿고 보는 체육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마음에 믿거체를 밀어내고 믿보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함께 근무했던 체육교사들이 나의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믿거체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어느샌가 내가 믿보체를 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퇴근 시간을 넘겨서 또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아이들의 운동을 지도하는 그들의 진심에 감동한 순간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나 희생이 승진과 같이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미래의 가능성을 위한 오늘의 고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오늘의 휴식이나 워라밸이 더 중요한 가치일 수도 있다. 동료교사를 배려하고 돕는 모습이 고마웠던 시간도 있었다. 우연히 가까이에서 목격한 순간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경우가 더 많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거의 모든 순간에 체육교사가 함께 해줬다. 발간실이나 등사실에서 교무실로 A4용지를 옮겨야 하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부터 마음의 힘이 필요한 순간까지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내가 운이 좋아 훌륭한 체육교사들을 많이 만났을 수도 있다. 근데 그게 단순히 내 운이었겠는가. 이 땅의 모든 체육교사들이 겪는 고충과 어려움을 짐작한다.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는데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하고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넓은 운동장에서 수업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상상만으로도 고되다. 게다가 업무는 체육교사라는 이유로 으레 학교폭력이나 생활지도를 당연하게 맡기지 않는가. 당신들의 힘듦을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이해한다. 그대들을 응원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Claudio Bian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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