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배웠다. 남자는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고. ‘아빠가 돈을 벌어야지’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내 역할도 그렇게 정해진 줄 알았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 그것이 가장의 의무였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거실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엔 평범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저마다 바쁜 목적지를 향해 달렸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는 이웃들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 장면을 지켜볼 뿐,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당당하게 아내에게 카드를 건넸다. 아이들과 외식을 하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샀다. 하지만 이제는 계산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다.
‘이걸 사도 될까?’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던 카드가, 이제는 무겁게 느껴졌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뼈저리게 다가왔다.
“아직 일 안 구했어?”
친구의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말은 쉽게 나왔지만, 현실은 버거웠다.
“응, 아직. 좀 더 알아보려고.”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다시 노트북을 켜면 막막했다. 친구들은 바빴다. 승진했고,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해외 출장을 다녔다. 다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걸까?
SNS를 보면 누구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누구는 대기업에서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예전에는 나도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멈춘 것 같은 느낌이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도, 예전과는 대화의 흐름이 달라졌다.
“요즘 뭐해?”
질문을 받는 순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에는 바쁜 일정을 이야기하며 주말에나 겨우 쉴 수 있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바쁜 하루가 없다. 순간 당황하며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어.”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친구의 표정에서 어색함이 묻어났다. 어쩌면 그 어색함은 내 안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퇴근한 아내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회사를 다니고,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과도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다. 나는 그저 설거지를 하고, 가끔 장을 보고, 청소를 하며 하루를 채웠다. 하지만, 이게 내가 할 일인가? 예전에는 월급날 아내에게 카드를 건네주며 가족을 책임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이 옷을 살 때도 가격표를 먼저 확인하고 있다.
아내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오늘 하루 어땠어?”
나는 잠시 망설였다.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간 하루였다. 아침에 이력서를 몇 개 보냈고, 청소를 하고, 저녁 장을 봤다. 하지만 그런 말이 의미 있는 대화가 될까 싶었다.
“그냥… 평범했어.”
아내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순간, 이 대화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가 살아가는 하루의 무게가 달라진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함께 놀아달라는 아이의 요청에 나는 머뭇거렸다.
“아빠, 같이 놀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나는 지금 무언가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내 마음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가끔 집안일을 하지만, 그조차도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순간이 많았다.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고 저녁상을 차려도,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내가 퇴근하면 그저 익숙한 듯 옷을 갈아입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되었을 뿐이다.
가장의 역할이 ‘돈을 버는 것’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걸까?
아내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 요즘 많이 힘들지?”
나는 애써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아내가 일하는 동안 나는 집에 있었고, 그녀가 가정의 경제상황을 지탱하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벌지 못했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누군가 나를 찾지도 않았다. 점점 더 존재감이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조용히 내뱉은 말에 아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작은 움직임이 어쩐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가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정답을 찾지 못한 채, 커피잔을 든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