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이야기
‘띠띠띠띠띠띠’
도어록을 열고 곧장 방으로 간다. 방문이 열리고 갈색 책상 위 절전 모드인 모니터와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컴퓨터 본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왼쪽에 있는 침대에 몸을 맡기자 뭔가가 마음속에서 느껴진다. 이건 허무함일까, 슬픔일까, 무력함일까, 해방감일까. 그건 모르겠다. 말로 쓸 수 있었으면 지금 침대에 누워있을까. 그냥 축 늘어져 눈을 감는다. 시야가 깜깜해진다. 졸리지는 않지만 뭔가 잠이 드는 것 같다. 그리고 악몽일지도 모르는 꿈에 빠진다.
그 시작은 개학부터였다. 아니 어쩌면 3학년 첫날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축제다. 2학기에 자리 잡은 가장 큰 행사. 학생회 시작부터 꽤 많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말만 들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맞닥뜨리니 실감 났다. 슬로건 공모전, 축하 영상 공모전, 참가자 오디션, 리허설까지 본 게임 전에도 참 많은 행사를 했다. 그리고 이런 행사 중에 가장 많이 느낀 것이 있다.
바로 번 아웃이다. 말 그대로 활활 타버려서 재만 남은 그런 상태. 아마 오디션 후에 처음으로 느꼈었던 것 같다. 집에 오니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무기력이라고 해야 할까. 연료가 다 한 느낌이었다. 학교에서는 비교적 활기찼던 걸 보면 화력은 전이랑 비슷했다. 16년 동안 쌓아온 나무가 동나버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원래 잘 빠지지 않던 학원도 빠졌다. 평소 학원이 집이라며 말해왔는데 살짝 충격이었다. 그냥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잠을 잤고 잠이 오지 않으면 핸드폰을 봤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계속 흘러갔다.
대망의 축제 하루 전, 리허설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대 공연 리허설이었다. 나는 사회자, 합창부, 밴드부로서 많은 것을 했다. 리허설이 2시간가량 진행되었는데 거의 쉬지 못했다. 심지어 마지막 밴드 무대까지 거의 망쳐버리다시피 해서 매우 속상했다. 뭐 내가 속상하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지만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수많은 번뇌와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이게 맞는 건가, 안 할걸 그랬나, 의미가 있나 같은 생각 말이다. 그리고 리허설도 이 정도인데 축제 때는 어쩔지 걱정도 되었다. 후회와 걱정이 섞인 씁쓸함과 함께 눈을 감자 다음 날은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말에 산 데님 팬츠와 흰색 반팔 셔츠를 꺼내 입었다. 가방에 교복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카메라이다.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료로 사진을 찍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날 결심해서 수준이 매우 조잡하긴 했다. 하지만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일단 학교로 갔다. 우선 축제 안내 방송을 먼저 해야 했다. 그래서 조수 겸 친구에게 제작을 부탁하고 담당 선생님과 방송 계획을 짠 뒤 방송실로 갔다. 뭐, 이런 스피치? 말하기? 에는 회장 선거 이후로 자신이 생겨서 잘 끝냈다.
방송실을 나와 반으로 올라가자 조수가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조수와 같이 팻말 만들기를 마무리했다. 펫말에는 조수의 글씨체로 ‘무료로 사진 찍어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왠지 모를 고양감과 함께 카메라 가방을 옆으로 둘러메었다. 3학년 층, 2학년 층, 1학년 층, 중앙현관, 후관, 본관..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다니다 보니 끝날 때쯤엔 예상 인원의 2배인 30명의 이름이 팻말 뒤편에 적혀있었다. 뿌듯했다. 하지만 사진 속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나와 그들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에 비슷한 작품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작품 속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사진을 찍는 내 얼굴은 어땠을까. 웃고 있었을까?
시간이 약 1시간 정도 지나 일찍 공연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망의 축제 막이 열렸다. 나는 맨 앞 열, 그중에서도 제일 오른쪽에 앉아있었다. 내 이름표도 있었다.(누군가가 왜 네가 이름표도 있느냐고 당장 때 버려야 한다고 구박하긴 했지만..) 행사가 진행되다 보니 내 소개가 있었다. 호명되고 일어서는데 함성이 엄청나게 크게 들려서 학교생활 잘했나? 같은 생각도 들었다.(누군가는 민심을 관리하라고 하긴 했지만..) 곧이어 축사도 진행되었다. 내 순서가 되어서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딱 잡으니 말이 술술 나오는 게 오늘날이구나 싶었다.
축사를 마치고 어느새 무대 공연이 시작될 순서였다. 1부 사회자를 맡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옆 단상으로 향했다. 호응 유도도 하고 멘트도 치고 이벤트도 하고 합창도 하고 이것저것 다 했다. 그러자 2부가 시작되었고 한시름 놓나 했는데 바로 2부 마지막 밴드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어제보다 좋은 상태에 가벼운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갔는데 막상 무대 위에 서니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게 막 긴장되었다. 노래를 부르는데 내 목소리는 관중 박수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는 것이 아닌가 -특히 무대 오른쪽 성가대 좌석 맨 앞에 앉아 엄청난 응원을 해준 두 명의 친구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는 한 것 같다. 그 뒤로 2부 응원자들과 합류해 마무리 멘트를 치고 한 30분 정도? 물건도 나르고 뒷정리를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검은 아스팔트로 덮여 오후 5시의 따스한 햇볕이 느껴지는 주차장이었다. 그런데 느껴지는 건 따스한 햇볕 너머 공허함, 어쩌면 차가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잘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집에 와서 의자에 앉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뭔가 등산 후에 느껴지는 뿌듯함과 뒤따라 오는 싱숭생숭한 그런 감정이랄까. 이렇게 보면 설렘, 저렇게 보면 허망함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느낌말이다. 나에게는 즐거움을 나눌 사람들도, 아쉬움을 나눌 사람들도, 슬픔을 나눌 사람들도 없어서 그런 걸까. 그냥 모든 감정이 휘발돼서 무만 남은 그런 기분이었다.
요새는 전반적으로 그러했다. 뭔가 가면을 쓴 기분. 의도적은 아니었지만,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는 웃고 안 힘들다고 말하지만, 안에서는 침대에 몸을 맡기고 눈물 흘리는, 그런 느낌. 그리고 그것의 반복. 앞으로 나아가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전은 없는. 마치 쳇바퀴 같은.
그리고 장면은 다시 현관 앞으로 돌아가 번호를 누른다.
'띠띠띠띠띠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