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담는 우주의 변화

음악 전달 매체에 대한 단상.

by tearliner

하나의 LP 음반은 하나의 우주다. 12인치, 가로‧세로 31센티미터 남짓의 사각형 재킷에서 얇고 둥근 LP판을 조심스레 꺼낸다. 지문이 묻지 않도록 양 끝을 손바닥에 걸치고 후후 불어가며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털어 낸다. LP 플레이어에 올려놓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짙은 검은빛을 내며 LP판이 촤르륵 돌아간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블랙홀 같아서 가운데로 빨려들 것만 같다. 블랙홀의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바늘을 올리면 처음 들리는 정겹고 구수한 지지직 소리는 묘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장작이 타면서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방송이 끝난 TV나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보면 들리는 잡음 같기도 하다. 흑백 점들이 난무하는 화면과 함께 흐르던 최면이 걸릴 듯한 그 노이즈는 우주의 탄생을 증명하는 우주 배경 복사의 전파 신호라던가. 그래서인지 지지직 잡음을 내는 LP판은 내게 그 생김새만큼이나 우주와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뜨거웠던 태초 우주의 신호가 지난 후 음악이 아름다운 은하계가 펼쳐지듯 흐르면 몸과 마음은 곧 곡의 분위기에 따라 어깨가 들썩거려지거나, 반대로 차분하게 늘어진다.


초등학교 6학년, 열세 살에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1990년을 음악에 빠진 해로 명확히 기억한다. 아직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내게 거실에 장식품처럼 존재했던 낡은 오디오가 형•누나이자 친구이자 선생이 되어 주었다. 당시에는 오디오를 ‘전축’이라 불렀는데, 왠지 검고 거대한 기계의 이름으로 근사하게 어울렸다.

정면의 대문 같은 유리를 열면 위로부터 LP 플레이어, 라디오, 스피커 볼륨과 전원 버튼이 있는 앰프 부분, 그 아래에 좌우로 두 개의 카세트테이프 데크 등 다섯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낡은 오디오라 CD 플레이어는 없었지만 다채로운 층층 소리 건물은 내게 귀를 번뜩이게 만드는 일종의 만물 백화점이었다.


제일 상층에 위치한 투명한 플라스틱 덮개 넘어 보이는 둥그런 LP 플레이어가 먼저 흥미를 끌었다. 빠르게 도는 매끈한 판에 바늘을 올리면 웅장하고 동시에 세밀한 음악이 5층 건물 좌우의 스피커를 통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대체 검은 쟁반을 긁는 저 조그만 바늘 어디에서 소리가 나오는지, 마술 같은 기술적 원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다채로운 사운드의 매력에 마냥 빠져들었다.

이듬해 영원할 듯했던 소련이 붕괴되고, 영국 밴드 퀸Queen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죽었던 1991년에는 본격적으로 LP판을 구매해 듣기 시작했다. 명절 세뱃돈을 받거나 용돈이 생기면 (전투기 프라모델을 샀던 초딩 어린이 시절과 달리)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미리 점찍어 뒀던 음반을 구매했다. 후에 이사를 하면서 LP판과 '전축'을 통째로 버리기 전까지 대략 30여 장을 모았다. 갓 어린이를 지난 중1 학생이 쌈짓돈을 모아 수집했음을 감안하면 적은 양은 아니었다. 가지고 있던 음반 중에 '마이클 잭슨'이나 팝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발라드 가수 ‘토미 페이지’, 록밴드 ‘스콜피온스’ 등의 커버디자인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시간이 지나 LP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신기술인 CD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세는 카세트테이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워크맨을 들고 다녔으니 카세트테이프는 감수성이 넘쳐흐르던 내 청소년기를 온전히 함께한 셈이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음악은 라디오 덕분에 풍족할 수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문화 예술의 보고였던 라디오는 내게 놀이공원이었고 원더랜드였다. 거기에서는 유행곡이 끝도 없이 공짜로 이어졌고, 사연을 통해 시시콜콜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줬으며, 지방이어도 최신 뉴스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듯 상상력을 북돋우는 라디오 드라마도 방송되었다.

나는 녹음을 방지하는 카세트테이프의 움푹 들어간 양쪽 귓구멍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막고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을 녹음했다. 어떻게 가능하지 싶을 정도로 먼 공간을 날아온 전파가 스피커를 통해 발산되어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도 데크의 빨간 레코드 버튼과 재생 버튼만 동시에 누르면 증발될 일 없이 카세트테이프에 고이 담겨 수천 번이고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반복해 들을 수 있었다. 곡의 시작이 라디오 DJ의 멘트와 중첩되고, 곡 끝나기도 전에 광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듣고 싶을 때 마음껏 들을 수 있었기에 곡 상태야 어떻든 그저 행복했다. 공테이프가 부족하면 누군가 버린 영어 교육이나 종교 관련 카세트테이프를 주어와 음악을 담았다.

데크가 두 개여서 카세트테이프 간에 옮겨 담기도 가능했기에, 좋아하는 음악 중 시작과 끝이 깔끔한 곡을 따로 골라 녹음해서 친구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테이프 표지에 ‘후니의 베스트 앨범 to. XX에게’ 같은 유치하지만 당시에는 진지했을 제목을 달고, 색깔 펜을 이용해 정성껏 곡 리스트를 적었음은 물론이다.


급변하는 시대의 낀 세대로 살아온 만큼이나 다양한 사운드 재생 장치와 전달 매체의 급격한 흥망성쇠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거의 사장되었다가 최근 레트로 열풍을 타고 재생산되는 LP판과 카세트테이프, 잠시 주력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CD와의 경쟁에서 탈락한 MD(Mini Disk), 완전히 대세로 자리를 굳힌 듯싶었던 CD, 물리적 저장 장치의 한계를 넘어선 MP3, 그리고 현재의 스트리밍까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전달 매체의 주역은 변화를 거듭했다.

음악 산업은 변화하는 전달 매체의 속성과 경제적 흐름에 맞게 적응과 변태를 거듭해야만 했다. 전달 매체를 직접 생산해 적응에 취약했던 공장이나 레코드 음반점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창작물을 담는 매체 시장의 변화는 곧 뮤지션의 경제 생태적 변화를 야기했다. 뮤지션으로서 이렇듯 굵직한 음악 전달 매체를 대부분 경험했다는 점은 커다란 자양분이고 축복이자 동시에 변동기마다 극복해야 할 재난 재해기도 했다.

나의 경우 인디밴드 ‘티어라이너’로 2004년에 앨범사와 계약했을 당시 음악을 담는 주요 매체는 CD였다. MP3 및 스트리밍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CD가 전성기에서 내리막을 향할 무렵 데뷔해 정규 앨범을 냈고, 다행히 기대 이상으로 음반 판매량은 높았다. 하지만 첫 앨범이 마지막이었다. 이후의 앨범 발표는 대부분 디지털 싱글의 형식으로 온라인에서 발매되었고, 스트리밍으로 들려졌다. 정규 앨범이나 컴필레이션 앨범을 물리적 매체인 CD로도 형식상 발매했지만 찍어 내는 양은 이전의 10분의 1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시장은 완전히 변했다. 대부분의 리스너는 더 이상 커다란 LP판을 사서 금이라도 갈까 조심해가며 수록된 모든 트랙을 듣지 않는다. 물리적 소유 대신 월 결제를 통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정착했다. 플랫폼을 제공하면서 수익을 올리는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의 힘은 갈수록 막강해졌다. 그들은 신곡을 선별하거나 인기곡을 모은 ‘TOP 100’, 추천리스트 같은 서비스로 음악 시장을 좌우한다. 신보를 내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메인 화면에 올려 주느냐, 뒤로 밀리느냐가 흥행의 관건이 되었고, 홍보 자료나 기사를 얼마나 잘 보이는 메인 코너에 위치시켜 주는지가 중요해졌다. ‘TOP 100’에 오른 곡과 그렇지 못한 곡이 받는 관심과 수익의 격차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 진화한 사재기 부작용이 생겨났고, 가수와 소속사들은 그런 편법에 혹했다. 발매 직후 특정 시간에 팬들이 동시에 구매하거나 집중 스트리밍[그런 조직적 활동을 '스밍총공(스트리밍 총공세의 준말)'이라고 하더라]을 통해 좋아하는 가수의 발표곡 순위를 올리는 일은 정당한 행위로 치부되며 별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조작이라고 여기지도 않는 지경이 되었다.

스트리밍은 접하기 쉽고 편리한 장점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했다. 애정을 가지고 곡을 끝까지 듣기보다는 1분 안에, 빠르면 15초 안에 귀를 낚는 자극적인 후크hook송이 관심을 얻을 확률이 높아졌다. 열 곡이 넘는 앨범을 감상하기는커녕 한 곡을 끝까지 듣기도 힘들어서, 긴 호흡의 흐름과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담은 정규 앨범을 완성하기보다는 한두 곡의 가벼운 디지털 싱글 발매가 시장의 대세가 되었다.

SNS를 이용한 노골적이고 부풀려진 다양한 창구에서의 홍보가 중요해져서 뮤지션은 음악 실력만큼이나 자신을 홍보하고 이슈화하는 능력이 인기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강력한 홍보 창구와 기획력을 가진 거대 연예 기획사 소속이 아니라면, 현시대 대부분의 작가와 예술인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자기 홍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트리밍의 단점만을 부각하고 LP판이나 CD 같은 물리적 매체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음악을 제대로 담아내기만 한다면 어떤 수단이든 좋다. 물리적 매체는 상대적으로 비싸면서 쓸데없이 크고 고장나기 쉬운 만큼이나 환경 이슈에서도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진 자들에게 접근성 높은 물리적 매체보다는 모두가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스트리밍의 보다 평등한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다. 뮤지션에게 불리한 수익구조일지라도 그 뮤지션의 음악을 더 쉽게 접근하고 저렴하게 만끽할 수 있다면, 그렇게 자신의 음악이 많이 들려지고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스트리밍의 가치는 충분하다.


LP판을 닦고 앞뒷면을 돌려가며 밤새 음악을 듣고, 워크맨을 잠자리에서까지 듣는 것도 모자라 수업 시간에도 이어폰을 옷 안으로 넣어서 몰래 듣고, CD 부클릿에 적힌 가사를 옮겨 적어 가사를 외워 가며 듣고, 이제는 스마트폰의 스트리밍 어플을 통해 최신곡이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듣는다.

같은 음악이 들어 있어도 전달 매체가 다르면 태도도 감상도 달라진다. 전달 매체 하나하나가 오롯이 독특한 나름의 문화와 산업과 감성과 문화형을 가진다. 다양한 매체로 음악을 즐기고 감성을 채워왔다는 건 리스너로서도 즐거운 일이거니와 뮤지션으로서도 다채로운 경험이었다. 어떤 시대를 살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선호는 다를 수 있다. 주관적 감정과 취향이 다를 수 있을 뿐, 음악을 제대로 담아내기만 한다면 어떤 수단이든 좋지 아니한가.

그러니까 나 같은 낀 세대는 카세트테이프 이모티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워크맨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을 줄도 모르는 어린 세대의 영상을 보자면 마치 저 새로운 지구인들로부터 100미터 정도는 뒤로 죽 밀려나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저 세상이 아득해지는 것이다.



사족. 책에 실을 목적으로 2018년에 썼던 꼭지를 조금 수정하고, 새 앨범의 이미지들을 추가했다. 음악 전달 매체는 그 사이에 빠르게 변화해서 글은 어디 내기 부끄러울 정도로 올드해져 버렸다. 레트로 문화가 유행하더니 사장되었던 LP가 힙한 소비로 다시 떠올랐다. 틱톡 등의 짧은 쇼츠에 흐르는 후크송이 흥행의 수단이자 바로미터가 되었고, SNS를 통한 이슈화나 뮤지션과의 협업 등이 주요 홍보창구가 되었다. 이제는 스트리밍 사이트에서의 노출보다는 유명 큐레이터들이 취향인 곡들을 모아서 올리는 '플레이리스트'의 힘이 막강해졌고, AI로 손쉽게, 순식간에 '찍어낸' 곡들이 스트리밍 사이트를 가득 채워간다. 그렇게 찍어낸 수만 곡을 역시 AI에 자동스트리밍 지시해 엄청난 수익을 가져가기도 한다. 공급과 수요가 AI에 의해 이뤄지며 수익을 가져가고, 게다가 프롬프트 작성자가 예술인으로 등록해 혜택을 받아가기까지 한다는 SNS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달라진 음악 세태에 대해서는 이후 정리해 이어지는 추가글 형식으로 새로 써야 한다.



tearliner - MUSICOMANIA (2024.10) / 오른쪽 앨범 굿즈 키링

레트로 유행을 타고 LP판이 다시 각광받고, 새로운 앨범도 LP로 출시되는 세상. tearliner의 신보 [MUSICOMANIA]도 2025년 12월에 LP로 한정발매했다. 단 하나뿐이었던 한국 공장은 대기가 길어 체코 공장을 통해 발주해야 했다. 먼저 발표했던 싱글들의 커버를 내 청소년기를 휘감았던 카세트테이프 콘셉트로 발매했고, 그 싱글과 신곡을 모은 정규앨범 역시 카세트테이프를 전면에 내세웠다. LP 커버 배경은 친애하는 독일 화가 슈테판 화이트Stephan White가 그려주었고, 그 위에 카세트테이프를 놓고, 별도의 텍스트나 홍보문구 없이 뮤지션명과 앨범타이틀, 트랙리스트 전부 카세트테이프에 적힌 그대로 사용해 카세트테이프에 힘을 줬다. 심지어 앨범 굿즈Goods로 함께 제작한 키링마저 카세트테이프 모양일 정도로 진심이었다. 하지만, LP와 CD로 발매했으면서 정작 카세트테이프로는 발매하지 않은 아이러니...


멜론 https://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11616444

스포티파이 https://open.spotify.com/album/48bheusHJqwmHh3FHJ9UBB?si=08R9xgCqRteIjfWVBOHFEA

애플뮤직 https://music.apple.com/kr/album/musicomania/1848741912

tearliner의 싱글 커버들.

모두 카세트테이프를 넣은 콘셉트의 tearliner의 싱글 커버들. 위 오른쪽부터 발매 순서대로.

tearliner - HEARTSTRINGS (2019.02.) - Photo by liner

tearliner - Love You, Stranger (2019.09) - Photo by liner

tearliner - Moon Rises, Love Falls (2020.04.) - Photo by liner

tearliner - My Aporia (2020.08.) - Photo by liner

tearliner - How We Lost in Melody (2023.12.) - Photo by liner

tearliner - You Are So Me (2024.03.) - Model Taebeen, Art by Taebeen, liner, Mini

tearliner - Because Haven’t Lived (2024.09.) - Artwork by Stephan White

앨범 [MUSICOMANIA]의 커버로 고려되었던 다른 후보들. 모두 카세트테이프가 중심인 콘셉트이며 친애하는 화가 슈테판 화이트가 그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