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 겨울엔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줘야겠다.
807호.
호텔 창밖으로 까마귀가 많이 모여있는 집이 내려다보인다. 어제 아침에도 그 집 주변의 전깃줄에 까마귀 떼가 잔뜩 앉아있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었다.
“엄마, 저기 또 까마귀 떼가 잔뜩 앉았어.”
“그래? 일본에는 까마귀가 진짜 많긴 하다.”
지원은 한별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나설 채비를 했다.
“엄마, 엄마. 저기 봐봐. 알았어! 나 알았어! 저기 할머니.”
“응? 뭘 알아? 할머니가 왜?”
한별의 다급한 말에 지원이 몸을 일으켜 창 쪽으로 다가갔다. 전깃줄에 새카맣게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그 집 앞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창가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앉아있었고,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까마귀에게 무언가를 던져주고 있었다.
“아~ 이래서 까마귀들이 이 근처에서 머물렀구나.”
“그런가 봐. 할머니가 까마귀들을 키우고 계셨어. 캣맘들처럼.”
“그랬구나. 그럼, 할머니는 크로-그랜맘인가?”
“그게 뭐야?”
“크로우가 까마귀고, 할머니는 그랜맘이니까, 합쳐서 크로-그랜맘.”
“크로-그랜맘? 하하. 엄만 참 이름도 잘 지어.”
까마귀 덕분에 활기 넘치는 아침이 되었다.
“별아. 아쉽지만 오늘도 로프웨이 운행은 안 하나 봐. 오늘은 아예 종일 운휴야. 텐구야마는 아무래도 내일 가야 하나보다.”
조심스럽게 건넨 지원의 말에 오히려 한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괜찮아. 내일 가면 되지 뭐.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랬잖아.”
이 아이는 어쩌면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할까.
내 자식이지만, 정말 사랑스럽기가 그지없다.
한별의 말은 평온했지만, 속눈썹 아래로 비치는 아쉬움이 스쳤다. 아마 한별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엄마만 알아차릴 미세한 변화였다. 평소 같았으면 웃음으로만 넘겼을 그 말이, 어쩐지 오늘은 조금 짠하게 느껴졌다. 한별의 어른스러운 말투에 지원은 가슴이 찡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거두었다. 한별이 자신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기에.
“텐구야마가 오타루 주인공이야?”
“응. 나한테는 그래. 작년에 너무 근사했거든.”
“그랬다고 했지. 그래서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아쉽지만 주인공은 내일 만나기를 바라며, 대신 오늘은 그때 바쁘게 떠나서 아쉬웠던 거리를 걸어 볼까, 하는데……, 어때? 오르골 당 있던 그곳.”
“좋지!”
어제보다 이른 출발이다. 눈보라가 있던 날씨였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같이 화창했다. 눈이 밤새 더 내려서 일까. 어제 한별과 함께 만든 눈오리들은 하루 만에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톡톡, 조심스레 파보며 지원은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면 어제의 흔적이 이렇게 사라지기도 하는구나. 사람들의 마음에도, 필요할 때마다 눈이 내리면 좋겠다. 지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별은 오늘도 눈오리 길을 만들면서 걸었다.
“엄마도 만들어 볼래?”
한별이 눈오리 집게를 내밀며 물었다.
“그럴까?”
지원은 가방에서 남은 눈오리 집게를 꺼냈다.
“짠! 두 개지롱-”
한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원은 두 손으로 집게를 펼쳐 한 웅큼 눈을 집었다. 조심조심 집게를 다시 펼치는데, 눈이 집게 안쪽에 붙은 채로 눈오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으악! 엄마! 동심 파괴! 오리가 쪼개졌다!”
한별의 호들갑에 지원은 민망해서 웃음만 났다.
“별이보다 경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
“하하. 자아, 보시라! 짠!”
“한별! 마치 눈오리 공장 같아.”
눈오리 떼를 줄지어 만들어내는 한별을 보며 지원이 말했다.
“엄마꺼 이리 줘 봐. 내가 실력을 보여줄게.”
한별이 지원 몫의 집게를 가져갔다. 하지만, 한별이 만들어도 결과는 같았다. 그 집게로 만든 오리는 지원의 작품처럼 쪼개졌다.
“어어? 안 되네? 엄마 실력이 아니라 집게 탓이었네~”
“그런 거야? 후- 다행이다.”
한별의 위로를 받으며 지원은 대단한 결격 사유에서 벗어난 듯 과장해서 말했다.
사카이마치 거리로 향하는 길에는 눈벽을 쌓아 차도와 차도 그리고 인도를 구분 짓고 있었다. 차도 사이 눈벽은 꽤 견고해 보인다. 보슬보슬한 눈이 쌓인 인도 쪽 눈벽에 쓰인 사랑의 메시지를 보고 지원과 한별도 함께 메시지를 남겼다.
‘엄마♡한별’
특히, 하트 모양은 쏙 들어간 부분으로 시작하여 하트의 꼬리에서 만나도록 서로 반씩 나누어 그렸고, 그 꼬리에서 두 손가락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일찍 나선 덕에 거리는 꽤 한산했다. 오타루 산책 버스? 지원은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겨울 동안에는 운행하지 않습니다. 산책 버스라는 이름에 낭만이 담겼다고 생각했다. 토토로 속 고양이 버스처럼 오타루 상공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운행정지라는 안내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때 은행가라 불리던 북의 월가를 지나 조금 더 걷자 익숙한 가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열었다고 해도 이제 겨우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지원은 그 모습이 마치 일상의 근사함을 보여주는 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오르골당으로 향하는 길에는 르타오LE'TAO, 롯카테이Lok'katei 같은 과자점들이 줄지어 있다. 그 부근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오타루에 온 지 3일 차지만,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느긋하게 식사를 한 후에 이 거리를 즐기기로 하고 한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파토스Pathos라는, 르타오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2시까지 런치타임 한정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산 소고기 안심 오믈렛, 연어알 크림 파스타, 문어 양배추 제노베제 파스타, 홋카이도산 소고기 도리아, 멜팅 리치 치즈 볼로네제.
“이거랑 이거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C세트로 주세요.”
지원은 오믈렛과 크림파스타 사진을 손가락으로 콕콕 짚으며 말했다. 660엔을 추가하면 더블 프로마쥬 치즈케이크와 티를 먹을 수 있는 것이 C세트였다.
“음료와 케이크는 식사 후에 드릴까요?”
“같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먼저 샐러드가 서빙되었다. 지원이 좋아하는 루꼴라가 주재료였고 새콤한 발사믹이 더해진 드레싱이 뿌려 있었다.
“으음-”
지원이 콧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맛있어?”
평소 야채에 거부감이 있는 한별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응! 너무 맛있어. 이제야 제대로 한 끼 먹는 거 같아.”
“그래? 그럼……, 나도 한 번…… 먹어 볼까?”
용기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의 한별이라면 분명 도리질을 쳤을 텐데. 심지어 생야채를 먹어보겠다는 한별의 용기가, 지원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엄마란 그런 존재였다. 음-마, 소리 한마디에도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고, 첫 뒤집기에 우리 아이가 천재처럼 느껴지는 게 어미 마음이었다.
“정말? 그래볼래?”
한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포크 집어 입에 넣었다.
“어? 맛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진짜?”
지원은 진심으로 놀랐다. 한별은 감각이 굉장히 예민한 아이이다. 어려서 귤이라도 먹여보려 귤을 손에 쥐어준 적이 있었는데, 그 촉감만으로 구역질을 했을 정도로. 지원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아이가 먹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사실 되게 맛있게 먹는 느낌은 아니다. 그보다 생각보다 괜찮은 식감인데, 엄마가 이리도 놀라고 좋아하니 맛있는 척 먹어주는 모습에 가까웠다. 입으로 넣기 전 눈으로 먼저 재빠르게 살핀 후 조심스레 씹으며 식감을 느낀다. 맛있게 냠냠 씹는 것이 아니라, 이만 겨우 맞닿아 질겅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지원은 그럴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한별이 기특했다. 여행이, 이곳이 한별이 용기를 내도록 돕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에게 보내줘야겠다. 우리 별이가 샐러드를 습격하고 있다고.”
“샐러드 습격? 하하하. 아빠가 놀라겠지?”
“그럼! 엄청 놀랄 거야.”
뒤이어 ‘오늘의 홍차’와 ‘더블 프로마쥬’치즈케이크가 나왔고, 식사도 차례대로 서빙되었다. 치즈 케이크 한 조각만도 꽤 비싼데 이 정도면 횡재한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한 조각을 물었다. 포근한 식감이 혀를 통해 전해진다. 홍차를 머금자, 케이크가 사라락 녹으며 홍차의 그윽함과 조화롭게 섞였다. 구운 새우가 얹어진 연어알 크림 파스타는 정말 고소했고, 안심 소고기 오믈렛은 고기가 조금 물컹한 식감이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보들거리는 계란만으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자, 이제 슬슬 나가서 걸어볼까?”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그래도 분주한 정도는 아니다. 푸른 하늘, 화창한 햇살. 여기저기 넘어지는 사람들의 비명이 경쾌한 비명이 뒤섞였다.
미나미 오타루 역에서 이곳을 시작으로 사카이마치 거리를 구경하고 오타루 역으로 가는 게 최상의 루트라고 들어왔으나, 지원은 단 한 번도 그곳에서 시작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경험했던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그간 지원의 삶이었다.
길 너머에 회갈색 벽돌로 지어진 오르골 당이 보였다. 오르골 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야 한다. 아침 햇살 때문인지 길이 살짝 녹아 도로가 굉장히 미끄러웠다.
오타루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안에 모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르골 당 안은 붐볐다. 황홀할 거라는 기대감으로 왔던 첫 오타루 이후, 오르골 당은 늘 분주했다. 작년도 올해도-. 삐걱거리는 마루 소리와 웅성이는 사람들 소리, 그럼에도 영롱한 오르골 소리. 모두가 잘 뒤섞여있었다.
1층에는 초밥, 보석함, 공중그네, 액자 등 다양한 모양의 오르골이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다. 작년에 한별은 우니 초밥 오르골을 샀던 터여서 인지, 더 이상 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4천엔 넘는 오르골을 사와 집에 전시해 둔 이후로 관심 밖이었기에, 지원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층은 조금 더 동화적이다. 각종 캐릭터 인형들과 동물 인형들이 여기저기서 귀여움을 뽐낸다. 하지만 그보다 지원이 2층을 오르는 이유는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광경이 오르골 당 최고의 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짝반짝. 댕그르- 댕그르-.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나무 벤치가 놓여있다. 그 한쪽에는 ‘쿠마고로’라는 나무 곰이 앉아있는데, 쿠마고로는 오늘의 날짜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한별이 그 옆으로 다가가 앉아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던 일, 그리고 그 사진을 찍기 위해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과연 대를 잇는 사진 스팟이구나.
남편과는 고교 동창의 소개로 만났다. 그 당시 지원의 카톡 프로필이 바로 이곳 오르골 당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당시에는 지원보다 큰 토토로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방울 털모자를 쓴 지원이 반달눈으로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나중에 남편은 그 모습이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다고 했었다. 그 뭐랄까, 도시 여성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이라나 뭐라나. 지금의 토토로는 한별이가 쪼그려 앉는 정도의 작은 인형으로 바뀌어 세월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오르골 당을 나가려는데, 스테인드글라스 유리문이 눈에 띄었다. 겨울 볕이 빨강, 노랑, 파랑의 색색 유리를 투과하며 나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색색의 칠을 해놓았다. 어서 와 보렴. 그 색칠이 마치 지원을 부르는 것 같아 그녀는 홀린 듯 다가갔다.
환상적인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릴 적 교회당 안의 나른한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고, 가보지도 않은 유럽의 어느 성당 안에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어린 지원은 기도하는 옆 사람의 옆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다가 이내 색깔 유리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었다. 마리아의 손이 지원의 머리에 닿는다. 따뜻했는데.
오후 2시.
건너편 르타오 건물에서 종소리인지 오르간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멜로디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계 아래에 대여섯 개의 종이 달려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걷던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춰 섰고, 모두의 눈길이 그곳을 향했다. 일제히 핸드폰을 들어 촬영했고, 지원과 한별도 멍하니 그곳을 응시했다. 눈길 위 종소리라니, 역시 오타루는 정말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그 낭만이 너무 완벽해서였을까. 이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 지금 이곳에 없는 그가, 불쑥 더 그리워졌다.
작년 삿포로 시계탑에서 근사한 음악이 나오며 라이트 쇼를 할 때 지원과 한별은 함께 무도회 춤 같은 것을 추었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춤이 어울릴까. 오르골 소리 같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종소리 같기도 했다. 촛불을 들고 조심스레 걷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지원은 춤 대신 잠시 눈을 감았다.
오타루는 곳곳이 먹을 것 천지인 거리였다. 지원과 한별은 한 과자점에 들어가 프로마쥬 데니쉬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동안 휴식했다. 동그란 데니쉬 빵 가운데에 프로마쥬 치즈가 잔뜩 얹어진 것으로 치즈케이크만큼 고소했다. 아이스크림은 홋카이도산 우유가 들어서 두 말 할 필요 없이 어디서든 맛있다.
과자점을 나오니 옆 건물 앞에 쌓인 눈더미 위에서 중국인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한별도 자연스레 그 무리에 들어가서 눈을 밟았다.
“아이들이 몇 살인가요?”
중국어를 전공한 지원이 물었다. 그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대답했는데, 엄마는 아마 가게 안에서 쇼핑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여섯 살이랑 아홉 살이요.”
“귀엽네요.”
눈더미에서 그들과 같이 놀던 한별이 말했다.
“말은 안 통해도, 눈에서는 다 통하나 봐. 크크.”
외국 어린이들과 같이 웃을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3시 반. 아무리 겨울이라도 한국이라면 아직 대낮일 시간인데, 이곳 오타루는 저녁의 냄새를 풍기며 하나둘 노란불이 켜지고 있었다. ‘스누피 빌리지’라는 가게 안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새로운 명물이 있나 싶어 지원이 먼저 가게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누피는 어쩐지 일본스러운 느낌을 들지 않아 돌아 나오려는 찰나, 한별이 작은 인형 고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갖고 싶어?”
“아빠 사다주고 싶어.”
“그래? 마침 내일 아빠 생일인데. 생일별로 살 수 있는 스누피 인형이라니 좋은 선물이 되겠는데.”
지원은 가판대를 돌려 남편의 생일이 새겨진 인형을 찾았다.
むつき므츠키. 음력 정월.
화목할 목(睦)에 달 월(月)을 쓰는 달이다. 화목한 달. 일본의 옛 선조들도 시작하는 달은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지원은 인형 고리가 그녀의 가족, 남편, 아들 모두가 화목해질 부적처럼 느껴졌다. 그 인형 고리를 꼭 쥐며 가족 모두가 서로로 인해 화안하기를 바랐다.
밖에 나와보니 이제 어둠이 깔려있다. 기타이치 가라스 3호관. 유리 공예품들은 지원의 눈에 요즘 스타일의 귀엽고 깜찍하거나 정갈한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다소 옛스러워보였다. 그에 반해 가격은 꽤 높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옆 기타이치 홀에서 아련한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슬며시 들여다보니, 등유 램프가 내부 곳곳을 어스름하게 밝히고 있고, 그 때문인지 어디에선가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낭만의 극치다. 다음의 오타루에서는 이곳에서 낭만을 즐기리라.
몇 걸음 더 걸으니 식당 앞에 남성 두 명이 서서 식당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두 사람 모두 주황색 상의에 까만 야구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식당의 직원이지 싶었다. 호기심이 일어 지원과 한별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구경했다.
두 사람이 던지고 있는 것은 눈덩이였다. 눈덩이가 날아가는 곳은 가게의 2층. 그들의 표정이 꽤 장난스러워 보여, 지원과 한별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머금고 그들을 지켜봤다. 그들이 던진 눈덩이의 표적은 2층 처마에 붙은 큰 고드름이었다. 홋카이도에는 칠팔십 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고드름들이 곳곳에 달려 있다. 무기라도 될 것 같은 크기의 그 고드름들을 지원은 신기한 눈으로, 한별은 갖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머리 위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꽤 위험할 크기였다. 이 직원들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고드름을 떼 내는 듯 보였다.
“와아-”
지원과 한별이 탄성을 내뱉자, 직원들이 두 사람을 보며 싱긋 웃었다.
“한번 해보실래요?”
둘 중 하나가 눈덩이를 내밀었으나, 지원은 가게에 손상이라도 줄까 싶어 냅다 고개를 저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드디어 눈덩이가 고드름에 명중했다.
“얏다(해냈다)!”
직원들이 아닌 지원이 내뱉은 말이었다.
“엄마, 저분들 완전 ‘고드름 킬러’야!”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지원과 한별을 보며, 직원들은 재밌는 공연을 마친 배우들처럼 웃어주었다. 한국이었다면, 동네였다면 아마도 별일 아니다 싶어, 그냥 지나쳤을 테지. 여행이기에, 타국이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지원은 생각했다.
다시 호텔을 향해 걸었다. 아까 오전에 문을 열 준비를 하던 가게 앞에 어느새 눈사람과 토토로를 닮은 귀여운 눈 모형이 생겨났다. 흰 방울 모자를 쓰고, 핑크색 목도리를 두른 채 웃고 있는 눈사람 앞에 그림 메시지가 놓여있었다. 손바닥과 신발 바닥을 그려놓고 그 위에 엑스 표를, 눈사람 주변에는 담배와 음료 컵 모양을 그려 넣고는 눈사람이 슬픈 표정으로 울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되는 것이 지원은 그저 신기했다.
눈사람과 토토로류의 눈 모형 사이에 앉아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예쁘게 사진을 찍고 가세요. 그러나, 손으로 만지거나 발로 차지 말고, 담배꽁초나 음료를 버리지 마세요. 그것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메시지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오타루 사람들은 자기 가게 앞의 눈사람이나 조형물을 직접 만들며 축제를 준비한다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이런 것들 모두 마을을 사랑하는 그들만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사람의 배 안에는 작은 촛대와 흰 초가 꽂혀있었다. 그 초는 오늘밤 그 안에서 환하게 빛나며 이 거리를 비추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지원은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엄마, 저기 저 완두콩 닮은 녀석 좀 봐봐. 크크크.”
“‘마리못코리’라는 마리모 캐릭터야. 귀엽게 생겼다. 그치?”
“엄마,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마리모 저 녀석. 꼬추를 그릇으로 가려놔서 너무 웃겨.”
“그래?”
“응. 온몸이 마리모 색깔인데, 그릇도 마리모 색깔이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거잖아. 그래서 웃겨.”
“별이도 차암.”
한별의 말처럼 마리못코리는 얼굴은 마리모처럼 둥글고 녹색인데, 몸체는 사람인 데다 남자아이가 분명하다는 듯 작은 그릇으로 중요 부위를 가려서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들어놓았다. 두 사람은 낄낄낄 웃으며 집을 향해 계속 걸었다.
이제 숙소가 보였다. 바로 옆 편의점에 들러 저녁거리를 골랐다. 한별은 쇼유 라멘을 지원은 샌드위치랑 마실 거리를 골라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로 로비가 북적거렸다. 지원과 한별은 그 사이를 뚫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침녘에 걸어나가 저녁녘에 걸어들어오니 제법 우리 동네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은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 우리 여기서 이렇게 지내니까 이 동네 주민 된 거 같아.”
한별도 같은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게, 전입 신고라도 해야겠는데?”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따뜻한 컵라면 국물을 호로록 마시며 한별이 개운한 탄성을 냈다.
“내일은 날씨가 오늘보다 좋으면 좋겠어. 텐구야마에 갈 수 있게.”
“엄마두.”
“사랑해, 엄마.”
“엄마두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에 지원은 매번 조금 당황한다.
“근데, 엄마는 왜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목소리가 작아져? 왜 자꾸 속삭여?”
수줍은 음색을 한별이 금세 눈치채고 물었다.
“그래?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어. 그냥 속삭여져.”
사실, 표현에 서툰 그녀에겐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수줍었다.
이 겨울엔,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줘야겠다.
사랑한다는 말이, 한 아이의 마음도, 서툰 어른의 마음도 조금은 덮어줄 수 있기를.
금세 한별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지원도 적막과 고요에 마음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