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 에세이
비교하는 말과 상처주는 말
비교하는 말은 불행의 씨앗이다. 누군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너무 위험한 말인데도 자연스럽게 비교되고 무심코 내뱉게 된다. 그 기준이나 잣대가 가까운 사람일 때도 있고 언론에 비쳐진 유명한 사람일 때도 있다.
‘엄친아’라는 단어가 왜 생겼는가? “엄마 친구 아들은 이번에 명문 대학에 갔다더라”, “엄마 친구 딸은 이번에 대기업에 입사했더라”, “사촌 누나 좀 보렴. 일찍 유학가서 벌써 경영학 박사를 따왔잖니”, “형처럼 공부 좀 열심히 했으면 의대도 가고 얼마나 좋니?”
뭔가 숨이 턱턱 막히는 말들이다. 내가 그 사람들과 똑같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엄마의 입에서 가장 날 비참하게 만드는 말들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애초부터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성공담이 내게 하나도 와닿지 않는다는 사실은 엄마가 모를리 없는데 뭔가 조언이라고 한다는 얘기들이 상처를 주는 말인 셈이다.
보통 아이들은 그냥 잔소리 중의 하나라고 귀를 닫아버리거나 그 자리를 도망치기 바쁘다. 아무리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잔소리를 해도 아이들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혈기 왕성한 아이들은 대놓고 따지기도 하며 서로 더 큰 소리로 말도 안되는 싸움이 시작되기도 한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 대학 갈 수 있어” “이거 먹어, 키도 크고 몸도 건강해진단다. 건강해야 뭐든 더 잘할 수 있지” “공부 잘하는 친구랑 어울려, 나쁜 친구들이랑 말 섞지 말고” “엄마가 말했지? 이렇게만 1등하는 건 시간문제야”
교육열이 높은 엄마들은 아이들의 시간표를 짜주면 엄마가 시키는대로 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강요하고 있다. 무조건 아이들이 내 뜻대로 자라주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고 말도 안듣는 아이들에게는 언어적인 폭력을 서슴치 않는다. “니가 그렇게 된데는 엄마 말을 안듣고 네 멋대로 해서 그런거야. 이제 알겠니?” “하고다니는 꼬락서니 하고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될려고 그러니?” “어디가서 얻어터진 거니?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맞아도 싸다” “정신차리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딴 짓 좀 그만하고” 이미 밖에서 상처를 받고 왔는데 집에 들어오니 더 상처가 되는 말들 뿐이다.
엄마도 속상해서 하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힘들었겠구나” “마음이 아팠겠구나” “많이 속상하겠구나”라고 위로의 말부터 했어야 했는데, 아이를 보자하자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해서 터져나온 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크다. 아들이 4학년 때 귓가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왔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번도 싸운 적 없이 순하게 자라온 아들이 이렇게 맞아서 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호들갑을 떨며 “누가 그랬어?”라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야 했는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따지기부터 했다. 아이 입에서 다른 아이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아들은 본인이 다른 애한테 맞아서 왔다는 것부터 화가 나서인지 울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가슴이 철렁하고 속상하고 당장 병원부터 가야할지 우왕좌왕 했다. 늦은 시간에 선생님에게 전화하기도 그렇고 고집 센 아이의 입을 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다행히 심하게 아픈 것 같지 않다는 말에 조금 이성을 되찾고 아이에게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서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이면서 슬쩍 말을 꺼냈다.
“혹시 많이 아프면 응급실이라도 가야한다” “어떻게 귀를 맞아서 그렇게 멍이 들 정도니? 너무 속상하다” 하얀 얼굴에 핏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서 얼굴이 뻘겋고 서로 싸워서 땀이 남건지 머리는 더벅머리가 되었다.
아이가 다쳐서 오면 사실 이성을 찾기 어렵다. 아이를 다그쳐서라도 당장에 그 상황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평소에 아이들의 싸움을 많이 보왔던 나도 내 아이가 다쳐서 오니까 이성을 잃게 되었다. 혼자서 속상해하고 화가 치밀어 오는 걸 참기 어려웠다. 내일 선생님께 전화해서 당장 학교폭력으로 신고할거라고 이를 악물며 다짐을 했다.
한편으론 늘 착하고 순하게 자라온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속에서 북받쳐오는 화를 참고 조용히 물었다. “엄마한테 말해도 되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줘. 이런 일이 처음이라 너무 속상하다”
엄마의 누그러진 표정에 안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곤 분명 친구가 그랬다고 했다. 친구들과 공원에서 놀다가 한 친구가 벤취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길래 자기도 좀 하게 해달라고 하며 옆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 기다려도 혼자서 신나게 게임을 하면서 잠깐을 안빌려주는 것이 약이 올라서 그냥 일어나서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주먹이 날라왔다는 것이다. 서로 엎치락 뒷치락 싸우게 되었는데 싸움을 잘하는 친구여서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았다.
얘기를 듣고나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친구가 갑자기 뒤에서 주먹을 날린 이유가 있을텐데 순한 우리 아이가 화가 나도 욕 한번 못했을거 같은데 일어나면서 뭐라고 했길래 주먹이 날라온 것일까?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현관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그 친구와 엄마가 호두파이 한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역시 친구는 우리 아들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보였다.
집으로 안내해서 함께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친구의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받았고 친구의 엄마도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내게도 사과했다. 사실 그 어떤 엄마도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교사라는 것을 알고 온 이상 나는 바로 이성을 찾아야 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이 시간에 찾아와 사과를 하는 이 모습에 당연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친구 엄마는 이 정도로 심하게 멍들었는지 몰랐다며 몇 번이나 사과하고 안타까워 했다. 친구가 운동을 해서 성격이 욱하는 데가 있다며 아이를 나무랬다.
나는 그 친구에게 “다시는 친구들을 때리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특히 운동을 하면 더욱 그렇게 힘을 과시해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아이들은 같이 과자를 먹고 아들 방에 들어갔다. 그 친구의 엄마는 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시면 병원비와 치료비를 물어주겠다고 했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아들은 그 친구와 친해져서 계속 잘 지내왔다. 심지어 다른 친구들한테도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친구가 핸드폰 게임도 많이 시켜줬다고 했다. 그후론 한번도 친구들과 싸운 적도 없었다. 아들은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그 해 생일에는 집안이 시끌벌적할 정도로 엄청 많은 친구들이 놀러왔다. 다행히 병원에서도 큰 이상은 없다고 해서 큰 문제 없이 잘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그날의 흥분은 기억되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는 정서적으로 엄청 큰 작용을 한다. 학교의 규칙이나 선생님의 감독이 있어도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아이들만의 리그에서 펼쳐진다. 어른들이 개입해서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과 학대와 강요와 책임이 맞물려 정체모를 권력과 복종의 관계가 나타난다. 이런 문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산재해 있는 문제이다. 학교폭력의 문제가 어느새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리 처벌이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어도 여전히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아픔은 내가 나에게 준 어떤 감정보다 더 큰 고통을 낳는다. 그건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아야 가늠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상처의 깊이도 다르고 그 결과도 다르다.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가 남듯이 마음에 박힌 상처는 오래 남아서 언젠가 또 꺼내지고 시간이 지나도 또 아프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있어도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서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심지어 본인은 그ᅟ건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럼 나의 상처는 누가 준 것인가? 사과조차 받지 못한 나는 또 한번 더 상처가 된다. 오히려 용기 내어 한 말이 둘의 관계를 더 어색하게 만든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냐는 핀잔만 듣게 된다.
그렇게 단순한 걸까?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을 나만 혼자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것일까?
사실 그 상처의 원인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도 자존심이 좀 센 편이라 남이 나에게 한 말 중에 무시하는 말, 비교하는 말을 듣게 되면 너무 기분이 나쁘다. 더떤 기준과 어떤 잣대로 비교하는지 모르지만 뭔가 결과만 놓고 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항상 기분이 나빴다. 학교 다닐때도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지는 성과가 눈에 보일 EO는 스스로도 만족하지만 열심히 했는데도 나보다 더 멋진 결과를 보이는 친구들을 보면 질투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늘 친구들을 이기고 싶어했다. 뭐든 잘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했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실기를 더 열심히 연습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실기가 있는 체육이나 음악이나 미술을 더 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음악이나 미술 재능은 친구들과 많이 비교되었다. 학원을 한번도 다니지 않았던 내게 음악이나 미술적 재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집안이 어려운 형편인데도 피아노 학원도 보내달라고 하고 걸스카우트도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뛰어노는 걸 좋아해서 체육은 뭐든 잘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현대무용이나 한국무용도 막힘없이 잘했다. 선생님들의 눈빛에서 관심받고 있고 칭찬받는 것이 너무 좋았다. 어려서 이것저것 해보는 것은 너무 좋은데 아이들마다 좋아하는 것은 다 다른 것이다.
그래서 비교하는 말은 삼가야 한다. 아이들의 다양한 관심과 재능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교하는 말 대신 칭찬하는 말, 상처주는 말 대신 상처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하는 말을 해야 한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고 말할 때,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 아이 앞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할 때는 항상 함께 듣고 있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엄마가 맨날 칭찬하는 사람이 내가 가장 질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잔소리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 비교하는 말, 질투하는 말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비뚤어진 비교의식이 싹 트게 되고 더 경쟁심을 일으켜 어떻게든 이기려는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질투하게 되고 질투는 불행의 씨앗을 만들게 된다. 결국 그러한 잣대에 스스로 얽매이게 되어 삶이 불행해 질 수 있다.
자녀앞에서는 되도록 아이들의 존중감을 길러주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존중감도 잘 지키는 배려심있는 아이로 자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