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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당

시&에세이

by 여상

[ 빈 마당 ]


저 감

왜 안 따나

주렁주렁 금덩이

가지가 휘청이는데


감 따간다

악다구리 놓던 할머니

도통 보이질 않고

오두막 옆 고사리밭

수북이 웃자랐네


잘만 쓰던 호미 양푼

잡초에 묻혀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굉이들 떠난

빈 마당


저 귀한 감

새나 주라하고

이제 편안히

손 놓으셨나




essay

고사리철이면 내 집 제쳐두고 4만 원 벌러 놉 나가시던 억척 할매.

"허리가 그런 양반이 뭔 남의 일이야."

"아이구, 나가면 4만 원이여."

"약값이 더 들겠네. 이제 그만 가셔, 엄니."


언젠가부터 허리 구부러진 할매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싶더니, 지난해 그만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가 병원을 다니느라 수개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이었나 보다.

할머니가 떠나신 집마당은 마음껏 자란 잡초가 잔뜩 씨를 맺어 놓고 있다. 널찍한 마당이지만 집이 너무 작고 낡아, 누군가에게 세를 놓을 형편이 못 된다고, 도시에 사는 아들인가 딸인가는 땅이 팔릴 때까지 내버려 둔다고 했더란다. 버려진 듯한 저 땅을 누가 선뜻 사겠는가. 시골의 빈 집은 이렇게 쓸쓸하게 생산된다.


여기저기 감, 밤, 호두나무도 그렇게 주인을 잃었다. 주인 잃은 나무들에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과실들이 열린다. 밤이나 호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주워 가지만, 늦은 가을까지 익어야 먹을 수 있고, 떨어져 터지면 먹을 수 없고, 높이 달려 있어 거두기 힘든 감들은, 늦가을의 풍경을 만들며 오랫동안 쓸쓸히 매달려 있게 된다. 맘껏 따 먹으라 해도, 흔하면 오히려 손대지 않게 되는 법이다. 가을 풍경의 이면이다.


가을감04.jpg




한동안 마을회관 노모당(할머니 경로당) 친구분들은 허전하셨을 것이다. 한 분 한 분 떠나시는 것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먼저 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오늘의 건강을 서로 염려해 주는 곳이 바로 노모당이다. 하루 이틀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제일 젊은 할머니를 앞세워 방문을 두드리는 것도 노모당의 힘이다.


가끔 매체를 통해 도시 노인들의 외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무료 전철을 타고 정처 없이 먼 곳을 다녀오시는 분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시는 분들의 모습은 외롭기 짝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마을 공동체 안의 시골 어르신들은 비교적 마음이 편안해 보이기도 한다. 대신 몸이 안 따라줄 때까지 죽어라 일만 하신 터라 몸 성하신 분들이 드물다는 애처로운 면 또한 그분들의 모습이다.




"오늘도 재미있게 지내셨나요?"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에 팔순 중반인 어머니께 전화를 드린다.

"그냥, 뭐, 그럭저럭." 어머니의 첫 대답은 항상 똑같다.

"친구분들은?"

"응, 놀다 갔지." 그다음은 어머니의 수다가 이어진다. 그때가 가장 마음 놓이고 행복한 시간이다. 참으로 귀여운 여인, 어머니 덕분에 밤마다 웃음보를 터뜨린다.


일찌감치 남양주 작은 면으로 은퇴하신 어머니에게는 좋은 동아리 친구분들이 있다. 면사무소가 마련한 요가교실, 노래교실 반원들이다. 어머니는 노래교실 한 자리를 젊은(?) 후배들을 위해 양보하셨다. 요가를 마치면 멤버들은 바로 면사무소에서 가까운 부잣집 할머니 댁에 모이시는데, 그 집이 재건축 공사를 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머니 아파트가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다. 치매방지를 외치며 1점에 50원짜리 고스톱을 치시는데, 따면 다 돌려준단다.

"그럼 뭐할라고 고스톱을 치셔?"

"재밌잖아!"

어머니가 개구쟁이처럼 웃으신다. 얼마나 고마운 동아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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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할머니 댁을 지난다. 밥을 얻어먹던 고양이들도 떠나간, 스산한 빈 마당. 이파리를 죄다 벗어던진 감나무 하나가 가을 풍경에 아름다운 점들을 찍어 놓았다. 그 감나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할머니의 삶이 외롭지 만은 않았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산기슭을 조금 걸어 올라가자 나무 아래 가시밤이 탐스럽게 떨어져 있다. 색 바랜 넓은 이파리 사이로 덜 익은 호두들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제법 큰 밤알 몇 개 주워 집으로 돌아왔다.




#가을 #빈집 #농촌 #감 #공동체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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