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봄
배추가 꽃 피었다. 언제 싹을 틔워 그렇게 자랐는지는 모르겠다. 문득 장을 보다가 봄동을 만났는데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봄동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지는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는 모임에서 누군가가 봄동으로 음식을 만들면 참 달다고 했다. 짐작건대 그가 오래지 않은 때에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었던 경험에서 나온 얘기인 듯했다.
그때 들으면서는 집에 가서 나도 봄동 요리를 하겠다고 생각해 두었다. 봄이 목전으로 다가와서야 봄동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적당한 크기의 배춧잎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듯 일정하게 붙어있으면서 어떤 건 초록이거나 끝은 연한 노란색이다. 단단한 듯 보이면서도 부드럽고 작은 잎을 떼어내어 맛을 보니 달다.
집에 오자마자 저녁 식탁에 올릴 것 같았던 봄동은 다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을 한번 맛봐야겠다고 하면서도 미뤄두었다. 그건 다가오는 계절에 대한 마음의 거리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 무렵이었다. 매일 오르던 김치가 지겹다고 여겨졌고 봄동이 떠올랐다.
특별한 찬이 없으니 봄동 겉절이를 해서 식탁에 올리기로 했다. 봉지 안에 배추 두 포기가 들어 있었는데 하나를 들었다. 깨끗하게 씻어내고는 잎들을 하나씩 떼어내었다. 칼을 사용해서 적당한 크기로 자르는 것도 좋지만 이럴 때마다 손을 고수한다. 그래야 변형되지 않는 그대로의 맛이 남아있을 것만 같다.
봄동 요리에 빼놓지 않는 사과도 반 조각 준비했다. 봄동 맛이 단편적이라면 적당한 굵기로 썬 사과를 만나면 음악의 리듬처럼 경쾌한 분위기로 변한다. 여기에 고춧가루가 들어간 양념으로 버무리면 색이 참 곱다. 지난 김장 양념을 넉넉히 해 두었던 터라 그것을 꺼내어 두 숟가락 정도 넣고 버무렸다. 살짝 싱거운 맛을 보강하기 위해 멸치액젓을 더했다. 여러 재료가 들어간 양념은 지난 시간만큼 맛이 진해졌다.
쓱쓱 무쳐내니 초록이던 것에 빨간 물이 들기 시작했다. 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숨을 죽였다. 아이와 단둘이 하는 저녁 시간이었다. 아이는 겉절이를 보고도 당연히 별 반응이 없다. 혼자 의식적으로 그것에 젓가락을 부지런히 오갔다.
처음에는 진한 풀 맛이 들어오고 그다음은 신비한 달콤함이다. 봄동과 함께하는 저녁은 조용하지만 다른 때와 달랐다.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봄’을 생각하게 하는 초록의 한 그릇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봄을 우선 맞이하려고 나름대로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바깥은 겨울이지만 마음과 주변은 그것과 다름을 구분하기라도 하듯 음식 재료에도 신경을 쓸 것이지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어떠하지 않아도 다가올 그 계절을 미리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봄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큰아이는 고3 수험생 막내는 중학교로 올라간다. 달라지는 것들에 대해 굳이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것도 어색하지만 자꾸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상하게도 좋은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에 무게 추가 기운다. 지난날 갑작스럽게 다가왔던 힘든 일들이 스치며 지금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다가올 따뜻한 날을 스스로 차단하려 한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도 봄동에 자꾸 눈이 갔지만 애써 외면하려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다 문득 봄동을 바구니에 넣고 와서 바로는 아니었지만, 음식을 만들어 식탁을 올렸다. 지극히 특별하지 않은 이일을 통해서 난 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제나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결국에는 마주해야만 지날 수 있거나 머물러 살아갈 수 있다. 자꾸 가슴이 콩닥콩닥이다. 그럴 때마다 진정시키며 바라본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니?” 하고 내게 질문을 던진다. 바로 답이 돌아오는 법이 없다.
자꾸 이런 것을 반복하며 흘려보낼수록 자연스럽고, 익숙해서 괜찮다. 이 글을 쓰고서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봄이 왔고 그럭저럭 맞이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