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불안, 엄마만의 책임인가요?
지역에서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지인들과 조촐한 글모임을 만들었다. 멤버는 나와 아내, 그리고 아내의 (육아)후배, 단 3명이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서로 읽고 이야기 나눈다. <브런치> 첫 글 ‘아빠의 육아와 일’도 글모임을 거쳤다. 육아의 고민을 글에 담으면 엄마들인 글모임 동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첫 글에서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면 아이들을 돌 볼 때는 육아만 신경 쓰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집을 나와 아이들과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내가 찾은 방법이라고 썼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퇴근한 아내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저녁에 커피숍에서 글을 썼듯이, 다른 엄마들도(딱히 직업이 없더라도) 스스로의 일(독서라도 좋다)을 위해 육아는 잠시 남편에게 맡겨두고 아이들과 떨어져 자신을 가다듬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왔다.
(육아)후배 : “우리 애는 아직 어려서 내가 없으면 엄마만 찾고, 아이를 집에 두고 자주 나가기 힘들어요.”
아내 :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랑 떨어지면 ‘분리불안’을 느껴. 그런 애를 두고 나가 있으면 마음도 편치 않아.”
유아교육학을 전공하고 공동육아 교사를 하다가 8년 동안 집에서 아이만 키운 ‘육아달인’ 아내의 말에 당장 토를 달수는 없었다. 먼저 분리불안이 뭔지 찾아봤다.
생후 6~7개월이 되면 엄마를 알아보고 엄마에게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다른 것을 탐험하다가도 곧바로 엄마를 다시 찾는다. 이렇게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껴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분리불안이라고 한다. 분리불안은 생후 7~8개월경에 시작해 14~15개월에 가장 강해지고 3세까지 지속된다. -『우리 아이 나쁜버릇 바로잡기』김영사
그럼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엄마는 하루 종일 아이에게 붙어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엄마의 품이 필요할 때 애착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면 이러한 불안은 3세 이후에 장애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엄마들은 혹시 내 아이에게 분리불안장애라도 생길까봐 적어도 만 3세가 되기 전까지 최대한 아이 곁에 있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아 서적에서 분리불안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내놓기는 한다. 엄마가 외출할 때는 꼭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엄마는 아이가 원할 때 언제든 보금자리가 될 수 있는 ‘믿을 만한 보호자’라는 신뢰를 줘야 한다는 등등.
과연 분리불안의 책임이 엄마에게만 있을까? ‘믿을 만한 보호자’는 꼭 엄마여야만 할까? 물론 자궁 속에서 열 달 동안 한 몸으로 있다가 함께 사투를 벌이며 두려운 세상 밖에 나와 처음으로 아늑함 느끼는 공간이 엄마의 젖가슴이라는 점에서, 엄마를 향한 아이의 애착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감히 아빠가 넘볼 수 없는 생물학적 경지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온 이상 아이는 생물학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으로 ‘믿을 만한 보호자’는 바로 아빠다. 아빠에 대한 애착관계가 신생아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하면, 엄마에 대한 분리불안은 덜할 것이다. 세상에 ‘믿을 만한 보호자’가 엄마 단 한 명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아빠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아이는 얼마나 든든할까?
육아 전문가인 아내의 말에 따르면, 분리불안은 꼭 엄마를 향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엄마든, 아빠든, 할머니든 영유아기에 ‘주양육자’에 대해 분리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주양육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환경 때문에 대부분 분리장애의 책임은 엄마에게 돌아간다.
“분리불안이 아빠들의 핑계처럼 들리기도 해요. ‘아이는 세 살까지 엄마랑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이죠. 세 살이 되기 전에 어린이집에라도 보내고 내 일을 찾으려고 하면 괜히 ‘내가 나쁜 엄마인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옭아매요. 오로지 엄마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 같아요. 아빠들이 엄마 없이 아이와 꾸준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욱 길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육아 후배)”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들의 ‘애착의 추’는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고 갔다. 누구나 그렇듯이 첫째 아이는 어릴 때 엄마 ‘껌딱지’였다. 4살 때 동생이 태어나면서 아빠 ‘껌딱지’가 됐다(동생 출산은 분리불안장애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6살 무렵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 순위를 매긴 적이 있는데 1순위는 아빠, 2순위는 고모 식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거쳐 엄마가 맨 꼴찌였다. 동생만 예뻐하는 엄마, 잔소리를 시작한 엄마가 싫었나 보다. 엄마는 상처받았겠지만, 그 당시 ‘엄마 싫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올해 아홉 살이 된 첫째는 이제 엄마를 좋아한다. 아빠 다음 2순위쯤 되겠다. 동생도 클 만큼 컸고, 조곤조곤 말을 들어주는 엄마의 대화 스타일이 좋나 보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첫째가 큰 불안 없이 애착의 추를 아빠 쪽으로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신생아 때부터 아빠와 애착관계를 조금씩 맺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만 3세가 되기 전까지 주양육자인 엄마가 항상 곁을 지켰던 영향이 더 크다). 첫돌이 되기 전에도 첫째는 엄마 품보다 아빠 배 위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내 배가 좀 푹신하긴 하다). 아이를 앉고 서서 배 위에 반쯤 걸친 채 천천히 흔들며 ‘엄마가 섬 그늘에’로 시작하는 <섬집아기>를 2절까지 부르기만 하면 십중팔구 잠들어 있었다. 돌이 지나 젖을 뗀 이후에는 아이 재우는 일은 거의 내 몫이 됐다. 그런 스킨십과 시간이 아빠와 아이의 애착관계를 튼튼하게 맺어준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감히 한 번 더 주장한다. 아빠와 애착관계를 위해서라도 아이가 어려도 아빠 품에 맡겨보라고. 이들의 스킨십과 시간이 무르익을 때쯤, 엄마는 아이와 공간을 분리해 자신의 시간을 가지라고. 그래야 육아와 일을 함께 할 수 있고, 아이와 엄마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 여부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에게 달렸다(이런 주장에 대해 아우성 칠 아빠들의 댓글을 환영한다).
최근 아빠가 된 착한 친구가 내 글에 댓글을 달았다. 아이를 낳아서 자신은 좋은데 아내가 힘들어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고 했다. 아내가 미안하고 고맙다면 새벽에 아이가 2~3시간마다 젖을 찾아 깨서 울 때 다음날 출근한다고 자는 척하지 말지며, 똥오줌을 싸서 울어댈 때 육아에 지쳐 쓰러져 있는 아내보다 먼저 기저귀를 갈아줄 것이며, 출근해서 졸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내가 육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나도 자는 척해봐서 안다). 이 친구는 착해서 이런 조언을 하지 않아도 잘 할 거라 믿는다.
아이는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지만 오늘날 마을공동체는 거의 사라졌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 주지도 않는다. 현실적으로 엄마의 육아 해방구는 부모님 아니면 아빠밖에 없다. 부모님께 맡겨두고 주말에만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좀 힘들어도 곁에 두고 매일 아이가 커가는 세세한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행복한 육아는 아빠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