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mains of the Day>

남아있는 나날

by 단 dan



내 손에 들린 태어난 지 열 다섯 해가 넘어가는 오랜 책은 열자마자 쏘아대는 시간의 매캐한 향내가 났다. 처음엔 그게 불쾌하고 거북해서 미처 표지를 열어보지도 못하고 며칠을 책상 위에 모셔만 뒀다. 그러다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와서야 의무감으로 다급히 읽어간 책이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책 속의 주인공은 말이 많다. 주렁주렁 끝없는 설명들에 시작부터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수다쟁이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그는 침묵한다. 주인의 입에서 나와 그의 귀로 들어가는 모든 이야기들은 판단 없이 그냥 그대로 흘러 보내고, 생각하지 않고,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모른 척하는 것을 택한다. 그것이 주인공의 일, 바로 훌륭한 집사의 일이라 여기는 탓이다.


그러나 그 우둔한 품위가 초래한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다쟁이 주인공이 이어가는 이 책은 큰 줄기인 영국의 도시 몇 곳을 여행하며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나도 말년에 영국 여행을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

우매한 그의 직업적 신념에는 연신 물음표가 붙었지만,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 술술 읽어 내린 뒤엔 곧장 동명의 영화까지 찾아보았다. 책 속에서는 독자인 나조차도 중반부까진 속아 넘어간 일들이 영화에서는 노골적으로 나온다. 주인공이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을 택했던, 아니 택할 수밖에 없던 비밀 아닌 비밀이 영화 속에서는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거다. 그렇게 영화는 책 속의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며 비극을 더한다.



책의 제목이 오역이라는 말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영화가 먼저 상영되고 책이 나온 탓에 영화의 유명세에 어느 정도 묻어가야 했기 때문일 거다. 영화에서는 제목인 <남아있는 나날>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보게 하는 엔딩이었기에 책보다는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아무래도 책에서는 <남아있는 나날> 보다 <The Remains of the Day>라는 원 제목이 더 잘 어울린다.




책을 읽고 나니 처음 거부감이 들게 만든 묵은 책이 뿜어내는 세월의 향내까지 사뭇 아득하게 느껴져 쓸쓸했다. 역자인 송은경 님이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구절까지, 슬프다.





#남아있는나날

#KazuoIshiguro

<The Remains of the Day>